Saturday, July 12, 2014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에버랜드 신개념 사파리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 ‘로스트밸리’ 사파리 코스 안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인 ‘평화의 언덕’이 그 해답을 보여준다. 평화의 언덕에는 육식동물인 치타와 초식동물 코뿔소가 함께 생활한다. 스웨덴의 한 동물원에서의 성공적인 사례를 적용한 것이지만, 때때로 치타와 코뿔소가 무리를 지어 대치하는 바람에 사육사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지금껏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사파리’가 새로 선보입니다. 펜스도 철망도, 장벽도 없이 바위 협곡과 수로 호수와 폭포에서 동물들이 뛰노는 곳. 이곳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것을 탐하는 맹수들의 포효가 아니라 조화와 평화, 그리고 공존을 보여주는 동물들의 세상입니다. ‘로스트밸리’. 이름하여 ‘잃어버린 계곡’입니다.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이나 평원이 고향인 20종류의 150마리 동물을 들여놓은 ‘인위의 공간’이긴 하지만, 이곳의 동물들은 생태적인 습성을 배려해 자연스럽게 조성한 사파리 구역 안에서 저마다 제 본능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맹수사파리에서 만나는 간담 서늘한 위협의 이빨이나 발톱 같은 짜릿함은 없습니다. 대신 동물과 동물이, 혹은 인간과 동물들이 서로 방해받지 않은 채 영역을 넘나들며 무심한 듯, 혹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지켜봅니다.

이렇게 서로 어울려 사는 동물들의 모습이 특별한 건, 동물을 유리벽이나 철창 너머 ‘구경거리’의 대상으로 대우하지 않고, 공존이란 소중한 가치를 드러내려 한 의도가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사파리의 곳곳에서 코뿔소와 치타가, 기린과 세이블앤틸롭이, 바바리양과 흰오릭스가 함께 살아가고, 이런 동물들 사이로 이따금씩 유리 없는 창을 가진 수륙양용차가 지나갑니다. 호기심 많은 기린은 차 안으로 자주 머리를 들이밀어 기웃거리고, 바위를 타고 앉은 산양은 겅중겅중 바위를 뛰다가 멈춰 서서 관람객들과 눈을 맞춥니다.

어쩌면 이런 공간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꿈의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가 동화 같을 리 없을 것이고, 동물을 가둬 놓은 인간의 이기를 합리화하는 것도 좀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래도 좋습니다. 언젠가 인적 드문 깊은 숲길을 걷다가 고라니 한 마리와 딱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가슴 떨림, 혹은 감동. 로스트밸리에서는 그 비슷한 것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작은 사진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바바리양, 관학, 얼룩말, 세이블앤틸롭. 가운데는 일런드. 아래 큰 사진은 세계적으로 단 300마리만 있다는 백사자의 당당한 위용. 국내에서는 에버랜드가 유일하게 크림색 백사자 6마리를 보유하고 있다.

# 치타와 백사자가 동물원에서 사라진 까닭

지난해 10월쯤의 일이었다. 에버랜드 주토피아(동물원)에서 치타 두 마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팽팽한 긴장으로 몸을 잔뜩 낮춘 채 우리 안을 불안하게 오가던 놈이었다. 그 뒤로 6개월 동안 에버랜드에서 치타를 본 관람객은 없었다. 

사라진 건 치타만이 아니었다. 이보다 한참 앞서 전 세계에 300마리밖에 없다는 백사자 3마리도 몸을 감췄다. 명물 중의 명물이었던 흰 갈기의 백사자를 동물원 안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뒤이어 거대한 몸집의 코끼리도, 쿵쿵 땅을 구르던 코뿔소도 차례로 사라졌다. 급기야 무리를 이뤄 겅중겅중 뛰며 관람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열두 마리의 기린까지 한꺼번에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필시 동물원 어디에선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일인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이제 그 비밀이 공개됐다. 에버랜드의 ‘로스트밸리’ 프로젝트. 로스트밸리는 에버랜드가 무려 500억 원을 투입해 2년여간의 준비작업을 거쳐 오는 20일 운영을 시작하는 신개념의 사파리다.

기존의 ‘사파리월드’가 맹수 중심의 사파리라면, 그 옆에 들어서는 로스트밸리는 초식동물을 중심으로 맹수를 함께 보여주는 사파리다. 에버랜드는 여기에 개장 이래 최고의 거액을 투자했다. 에버랜드가 로스트밸리에 전력을 추구한 것은 세계적인 테마파크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국내 진출 움직임에 맞서 야심 차게 준비한 회심의 빅 카드였기 때문이다.

동물원에서 사라진 맹수와 초식동물은 지난 2년여 동안 조성한 4만1000㎡(1만2400여 평)의 로스트밸리 공간으로 비밀리에 옮겨져 새로운 거처에 적응하고 있었다. 애초에 사라진 것보다 동물의 숫자도 불어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싱가포르에서 새로 데려온 놈들이었다. 

치타는 두 마리가 더 들어와 도합 네 마리로 늘었고, 백사자는 세 마리를 더해 여섯 마리가 됐다. 코뿔소도 두 마리에서 네 마리로 늘었다. 코끼리도 스리랑카에서 두 마리가 더 들어왔다.이뿐만 아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산양을 비롯해 굵은 뿔을 가진 무플론, 목 아래로 멋진 갈기를 가진 바바리양, 날카로운 뿔을 가진 세이블앤틸롭 등도 사파리의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에버랜드는 사파리와 인연이 깊다. 에버랜드의 전신은 ‘자연농원’. 지금으로부터 꼭 37년 전인 1976년 4월 18일 개장한 자연농원의 최고 명물은 단연 ‘라이언 사파리’였다. 지금처럼 버스를 타고 사자를 보는 사파리였다. 한데 너나없이 궁핍했던 시절에 사자를 외국에서 귀한 달러로 사 볼거리로 들여온다는 게 눈총을 받을 일이었던 모양. 자연농원 개장 직후 창경원보다 비싼 입장료에 대해 비판 여론이 일자 급기야 박준규 당시 공화당 정책위의장이 나서서 한마디했다. “도대체 사자를 왜 들여왔는지 모르겠다….” 지금 되돌아보면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다.

# 가로막는 ‘유리’가 없다는 것의 감동

‘로스트밸리’의 가장 큰 특징은 ‘수륙양용차’를 타고 물과 땅을 오가며 동물을 본다는 점. ‘말하는 코끼리’ 코식이의 뒤쪽으로 수륙양용차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로로 진입하고 있다.
로스트밸리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수륙양용차량을 타고 사파리를 즐긴다는 점이다. 수륙양용차를 이용한 사파리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길이 10.7m에 높이 3.85m의 수륙양용차는 당당한 근육질의 위용부터가 아이들에게 탐험의 흥분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4륜 구동 동력장치에 수중 프로펠러를 갖춘 수륙양용차는 영국으로부터 들여온 것. 양산 차량이 아니라 한 대 한 대 주문을 받아 수작업으로 제작된 명품이다. 

로스트밸리에 구태여 수륙양용차를 들인 것은 바위와 물길, 초지 등으로 다양하게 설계된 사파리 공간을 넉넉하게 주파할 수 있다는 강점도 있지만, 그보다 사파리 관람의 즐거움에 ‘탈것’의 재미를 보태주기 위한 것. 실제로 바퀴로 땅을 달리다가 일순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로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은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하다.

낯선 탈것인 수륙양용차는 여러 가지 매력이 있지만 그중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라면 ‘창(窓)’이다.

차량의 관람창에는 유리가 없다. 관람자와 동물 사이에 아무런 차단 장치가 없다는 건 그야말로 ‘감동’이다. 그게 뭐 대수냐 싶겠지만, 차량에 탑승해 보면 그 매력을 대번에 알게 된다. 게다가 이 차량이 지나는 로스트밸리의 사파리 공간에는 철책이나 우악스러운 우리도 없다. 오래돼 넘어진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거목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해 우리로 삼았고, 맹수들의 공간에서 꼭 필요한 부분에는 작은 관목 형태의 전기선을 꽂아 두었을 뿐이다.

차창에 유리가 없다는 것과 사파리 공간에 우리가 없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유리벽 너머의 우리 속 동물은 그저 ‘볼거리의 대상’으로 다가올 뿐이지만, 아무런 차단 없이 마주하는 동물은 감정이입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면 우리 속에 가둬져 불안하게 서성이는 고라니를 관람하는 것과 호젓한 숲속 오솔길에서 고라니와 딱 맞닥뜨렸을 때의 감동의 차이와 비슷하다. 

열린 공간에서 사이를 가로막는 아무런 장치도 없이 동물들과 눈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게 실상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위해 치밀하게 의도된 공간일지라도 말이다.

유리와 우리가 없는 동물과의 조우는 곧 로스트밸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드러낸다. 동물과 인간이 교감하는 생태형 사파리. 이것이야말로 독일 하노버동물원을 설계했던 독일 단펄만사가 에버랜드의 주문을 받아 그려낸 로스트밸리의 모습이다.

향기를 따라 선암사의 경내에 들어서다

조계산을 넘어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고갯길 굴목재. 초겨울의 청량한 그 숲길에도, 계곡의 맑은 물에도 낙엽이 떨어져 쌓여가고 있다. 발밑에서 사각거리는 낙엽을 디디며 이쪽 절집에서 저쪽 절집으로 넘어가는 길에 잠깐 걸음을 멈추고 물 위에 고요하게 떠 있는 낙엽들을 바라봤다.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의 선암사와 송광사. 어디가 더 낫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한 위세에다 그윽한 정취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맑은 절집. 다시 설명하기 새삼스러울 정도로 익히 알려진 곳이지요.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혹은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절집을 넘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조계산을 넘어 두 절집을 잇는 실낱같은 고갯길 ‘굴목재’입니다. 고갯길의 거리는 6.5㎞. 두 절집으로 드는 들머리까지 다 합친다면 8.4㎞ 남짓입니다.

단풍 따라 밀려왔던 행락객들의 어지러운 발걸음이 낙엽으로 지워지고 있는 절집은 고즈넉했습니다. 절집의 들머리에서 잘 마른 장작을 때는 내음이 코끝을 스쳤습니다. 절집에 딸린 작은 찻집에서 일찍 오는 손님들을 위해 대추차를 달이는 모양이었습니다. 이른 새벽, 순백의 차꽃이 피어난 절집을 지나고, 가지런히 도열한 편백나무도 지나서 흰 입김을 뿜으며 걸어 들어가는 숲길. 마지막 단풍을 아슬아슬 매달고서 시리게 선 나무들에게서는 알싸한 박하향이 풍겼습니다. 모든 숲이 바야흐로 ‘다 내려놓는 시간’을 맞아 고요로 출렁이는 시간. 이 길이야말로 그런 시간의 즈음에 딱 맞는 길입니다. 

두 절집을 잇는 산길에서 줄곧 따라오는 건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 위의 발자국 소리뿐. 가는 물소리와 나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 간혹 새소리가 발자국 소리 위에 겹쳐지기도 했습니다. 배낭 따위는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빈손으로 걷는 게 더 나은 길. 이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혹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맑은 기운이 몸 안에 가득 차 넘칩니다. 길 이쪽저쪽에서 마치 길을 묶어놓은 매듭처럼 자리 잡고 있는 두 곳 절집의 고요한 초겨울의 정취 또한 빼놓을 수 없지요.

이맘때 순천으로의 여정을 권하는 이유가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낙안읍성에서는 처마를 잇대고 있는 초가집 마당의 붉은 감나무와 볏짚을 태우는 연기가 낮게 깔린 풍경을 만날 수 있고, 순천만에서는 소설 ‘무진기행’의 한 대목처럼 밤새 진주해 온 안개로 가득한 갈대밭을 걸을 수 있습니다. 여기다가 좀 더 부지런하다면 상사호와 주암호 드라이브와 모후산 깊은 자락의 오지마을에 숨어 있는 정자 초간정의 아름다움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우화등선(羽化登仙).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된다는 뜻이다. 그 줄임말인 ‘우화(羽化)’란 이름이 송광사 산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건너는 다리에 붙여져 있다. 우화교의 아치형 교각 사이로 송광사를 찾은 관광객들이 징검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바라봤다.



# 향기를 따라 선암사의 경내에 들어서다

늦은 가을에 등황색 꽃이 피는 금목서란 나무를 아시는지. 그 꽃의 매혹적인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는지. 아는 이들만 아는 얘기. 가을날 선암사는 단풍빛 곱기로 알아주지만, 금목서의 꽃향기 덕에 눈보다는 코가 호사를 한다. 산문 아래 작은 연못 ‘삼인당’ 주변에 불붙듯 타오르는 단풍도 좋지만, 그보다 절집 경내와 주변의 금목서와 은목서에 꽃이 피어날 때 온통 절집을 가득 채우는 향기가 으뜸이란 얘기다. 나른한 봄날 선암사 무우전 담벼락에 뿌리를 내린 600년 묵은 고매화 선암매(仙巖梅)가 피워내는 향기가 그윽하고 은은하다면, 가을의 끝자락에 금목서가 뿜어내는 향기는 한층 더 강렬하고 아찔하다.

조계산 자락의 어깨를 타고 넘어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고갯길 ‘굴목재’로 들어서는 길. 두 절집을 잇는 길이니 선암사에서도, 송광사에서도 시작할 수 있지만, 구태여 선암사 쪽을 들머리로 잡은 것은 바로 ‘향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좀 늦었다. 잦은 찬비로 금목서 꽃은 이미 져가고 있고, 향기도 희미할 뿐이니…. 그렇대도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선암사 뒤편의 야생차밭에는 지금 순백의 차꽃이 한창이니 말이다. ‘차나무에도 꽃이 피냐’는 질문은 몰라서 하는 얘기다. 차나무는 초겨울 서리 속에서 제법 화려한 흰 꽃을 피운다. 노란 수술을 두른 꽃잎이 어찌나 정갈하게 희던지 그 꽃을 ‘소화(素花)’라 부른다. 이즈음 차밭에 가면 서리 속에 꽃이 구름처럼 핀다 해서 ‘운상화(雲霜花)’라고도 불린다. 선암사의 차밭에는 지금 오백 원짜리 동전만 한 꽃들이 초록의 차이파리 사이에 고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비록 짙지는 않지만 코를 가까이 대면 은은하게 느껴질 듯 말 듯 향내가 스친다.

초겨울의 선암사에 어찌 꽃향기만 있을까. 오랫동안 고쳐 짓지 않은 선암사의 묵은 절집 아궁이에 나무를 때는 냄새도 그윽하다. 선암사 초입의 자그마한 찻집에서 대추차를 달이는 향기는 또 어떤가. 여기다가 굴목재로 들어서는 선암사 쪽 초입에 힘차게 뻗은 편백나무 숲이 뿜어내는 알싸한 피톤치드의 박하향도 빼놓을 수 없다. 선암사로 드는 길에서 만나는 아치형 승선교의 아름다움과 문화재로 지정된 뒷간, 무우전의 돌확 등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송광사 쪽 굴목재 숲길. 절정의 순간은 지났지만 단풍이 늦는 이쪽에는 붉고 노란 잎들이 아직 화려하다.

‘미지의 땅’ 中 인촨 여행


옛 아라비아 상인들이 교역품을 싣고 오가던 실크로드를, 그때나 지금이나 이동수단인 낙타 등에 올라 타박타닥 걷는 느낌은 어떨까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막이라는 사포터우(沙坡頭)의 광활한 금빛 모래벌판 위를 사막 트레킹 전용차를 타고 질주하는 기분은 또 어떨까요. 

거기서 마주친 것은 죄다 이런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들이었습니다. 옛 실크로드의 관문이자 교역의 중심지였던 곳. 사막과 호수가 공존하고, 만리장성과 황허(黃河)강이 함께 있는 곳. 거기다가 이슬람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그곳이 중국의 닝샤후이족(寧夏回族) 자치구 성도인 인촨(銀川)시입니다. 

인촨이야말로 정반대의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이국적인 땅입니다. 지난 3월 우리나라 저비용 항공사인 ‘진에어’가 외국 국적의 항공사로는 처음 취항했습니다. 때묻지 않은 ‘미지의 땅’, 인촨의 이국적인 매력이 이제야 외지인들에게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사실 닝샤 자치구는 기후가 온화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중국 10대 휴양지’ 가운데 손꼽히는 곳이라는군요. 

닝샤 자치구는 주민 630만 명 중에서 이슬람족의 후예인 회족이 3분의 1에 달합니다. 그런 만큼 도처에서 웅장한 이슬람 사원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히잡을 두른 무슬림 여성이나 터번을 쓴 남자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면 이곳이 중국이 아닌 중동 어디쯤의 이슬람 국가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이국적인 느낌의 정점이라면 단연 사막지대였습니다. 특히 광대한 사막 바로 옆으로 인류의 문명을 피워낸 황허강이 급물살을 가르며 굽이굽이 흐르는 광경은 신기할 따름입니다. 물은 원래 모래를 쓸어내리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존재지만, 사포터우에서는 물과 모래가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 아래에는 거대한 샹산(香山) 줄기들을 병풍 삼아 아담한 호수가 자리잡고 있고, 옆으로는 만리장성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사막 가장자리에는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희귀한 장관이 펼쳐져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신비로운 자연의 모습입니다. 외국인 관광객과 공안(共安)과 비(雨)가 없는 3무(無)의 땅. 사막과 호수와 이슬람 사원이 많은 3다(多)의 땅. 인촨시를 찾아갑니다. 



중국의 4대 사막 중 가장 아름답다는 텅거리 사막이 시작되는 사포터우. 한적한 밤엔 사람의 혼을 울리는 모래의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이곳 사막에서 관광객들이 낙타 트레킹을 즐기고 있다. 파란 하늘에 금빛 물결이 춤추는 사막과 낙타 행렬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중국 서북부에 위치한 중국의 숨은 신비의 땅 닝샤후이족 자치구. 만리장성 끝자락에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자 이슬람교를 믿는 후이족의 고향이다. 이들 후이족은 약 1500년 전인 당나라 때 아랍과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상인과 병사들의 후손이다. 이 지역은 황허강이 가로지르고 있어 풍요롭고, 이슬람 문화와 동양의 정취가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 매력적인 곳이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외국인 관광객을, 인촨에서는 여행 내내 만나지 못했다. 현지인들이 한국 관광객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과 순박한 미소로 대해 주었던 것도 아마 그때문일 것이다. 통상 관광지에서는 여행자들이 현지인들에게 ‘사진을 찍자’고 청하는 법인데, 그곳에서는 정반대였다. 한국에서 온 여행자인 것을 알고는 현지인들이 번갈아가면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해 당황스럽기도 했다. 한류의 영향과 국력이 신장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드물게 보는 외국인이 더없이 신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의 다른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자주 눈에 띄는 공안들도 치안이 잘 돼서인지 이곳에선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근육의 힘이 아닌, 풍광의 힘으로 오르는 길

‘만물상’이란 이름 그대로 하나하나 닮은 사물의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것 같은 가야산의 암봉들. 그 위용이 어찌나 거대한지 사진 한 장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 만물상 한쪽의 일부분을 찍은 사진에서 암봉 위를 건너가는 등산객과 비교해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700여 년 전 낙동강 하류 일대에서 연맹국가를 이루고 있던 강성했던 고대왕국 ‘가야’. 그 땅이 뿜어내는 기운의 중심에 섰습니다. 경북 성주의 가야산. 가야산은 해인사와 홍류동이 있는 경남 합천 쪽으로, 또 경북 성주 쪽으로도 능선을 뻗고 있지만 그 기운을 제대로 느끼자면 성주 쪽에서 올라서 ‘만물상’을 딛고 서야 합니다.

바위들이 이름 그대로 ‘만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곳. 검붉게 치솟은 거친 암봉들이 마치 아우성처럼 힘차게 달리는 자리에 서니 심장의 박동까지도 빨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백운동 쪽에서 오르자면 두루마리 그림을 펼친 듯 이어지는 가야산 암봉의 끝자락쯤에는 ‘상아덤’이 있습니다. 가야산의 여신(女神)과 하늘의 천신(天神)이 만났다는 성스러운 전설이 전해지는 암봉의 무리입니다. 가야산 여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 그 이름마저 반듯합니다. 그가 상아덤에서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닦고자 밤낮없이 하늘에 소원을 빌었답니다. 

이런 정성을 갸륵하게 여긴 하늘신 이비하(夷毗訶)가 오색구름을 타고 이곳 상아덤으로 내려옵니다. 산신과 천신은 이 자리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대가야의 이진아시왕과 금관가야의 수로왕을 낳았답니다.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화려했던 단풍이 다 물러간 이즈음의 산하(山河)는 황량합니다. 이런 때 가야산을 찾아 오른 것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뒤에야 더 위용이 당당해지는 거친 암봉을 두르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만물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겨울의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이즈음이라면 신화처럼 전해지는 가야왕국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여정이 맞춤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가야산 아래 성주 땅의 성산가야의 고분에도, 이웃한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 유적에도 한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가 신라군의 기습으로 패망했던 가야왕국 시대의 이야기들이 서려 있었습니다. 어디 이뿐일까요. 성주에서 고령으로 흘러내리는 대가천 물길 곁에 무심한 듯 서있는 회연서원은 초겨울 낙엽으로 뒤덮여 적막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고, 조선시대 영남 사림파의 뿌리로 꼽히는 점필재 김종직 종택이 있는 고령의 개실마을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만이었습니다. 가야산의 만물상에서 시작한 발걸음을 성주와 고령까지 이으며, 이제는 다 스러지고 만 고대국가 전설의 흔적과 초겨울의 매혹적인 풍경을 길잡이 삼아 따라가봤습니다. 

경북 성주의 회연서원은 다른 계절도 못지않지만, 400년 된 느티나무가 내려놓은 낙엽이 서원 앞에 깔리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의 풍광이 가장 매혹적이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함께 앙상한 가지 사이로 서원 건물의 기와지붕이 그려내는 선도 아름답다.



# 근육의 힘이 아닌, 풍광의 힘으로 오르는 길

자칫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는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가야산을 오르는 만물상 코스. 초입부터 만만찮다. 가파른 사면을 따라 한참을 올라 몇 번이고 숨이 턱에 차 멈춰선 뒤에야 겨우 암봉의 능선으로 올라서게 된다. 과거 가야산을 오르는 코스는 합천의 해인사 쪽이 유일했다. 그때 가야산을 올라봤다면 그다지 거칠지 않은 유순한 산으로 기억할 법하다. 그러나 국립공원 지정 후 무려 37년 만인 지난해 10월부터 ‘만물상 코스’가 개방되고부터는 사정은 달라졌다.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올라선 뒤 암봉을 타고 넘는 코스가 여간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공원 내 탐방코스를 난이도에 따라 상, 중, 하로 구분하고 있다. 공단 직원들이 실제 산에 올라가 본 등산객들의 반응을 모아 점수를 매겨 난이도를 정한다. 전국의 국립공원 탐방코스 중 5㎞ 미만의 코스에서 난이도 ‘상’으로 분류된 곳은 모두 5곳. 그 중에서도 3㎞로 가장 짧으면서도 난이도 ‘상’으로 꼽힌 곳이 가야산 만물상 코스라니 이 정도면 말 다했다. 암봉의 능선에 올랐다고 해서 힘든 구간이 끝났다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오산이다. 바위 틈을 통과하거나 거대한 암봉을 비켜 돌아가면서 오르내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하지만 가야산 만물상 코스는 주말이나 휴일이면 탐방객들이 전국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든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백운동탐방지원센터 직원은 “한창 단풍이 물들던 지난 가을에는 한꺼번에 몰려든 산행객들로 정체가 빚어졌을 정도”라고 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만물상’이란 이름답게 기기묘묘하게 솟은 우람한 암봉의 빼어난 풍광이 팍팍해진 허벅지나 몰아쉬는 가쁜 숨쯤은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슬아슬 솟아있는 암봉을 하나씩 타고 넘을 때마다 탐방객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오름길의 끄트머리에서 다리 쉼을 하노라면 주변에서 “거참, 명산이네…명산이야”하는 찬탄쯤은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니 가야산에서 산행객의 발길을 이끌고 가는 것은 근육의 힘이 아니라 ‘장대한 풍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물상 암봉 끝자락의 상아덤을 지나 탐방코스의 갈림목인 서성대까지 당도하면 잠깐 망설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멀리 올려다보이는 칠불봉과 우두봉의 정상을 밟고 가느냐, 아니면 이쯤에서 유순한 낙엽으로 뒤덮인 계곡길을 따라 나무덱을 딛고 내려가느냐…. 하지만 제가 올라섰던 만물상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풍광이 기다리고 있는 정상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성대에서 칠불봉까지는 1시간쯤이면 넉넉하고, 여기서 우두봉까지는 15분이면 된다. 

단정하면서 그윽한 아름다움이 거기 있다

경북 영양의 반변천과 창기천의 물길이 Y자로 만나는 합수머리 남이포의 모습을 선바위에 올라서 내려다봤다. 남이포는 남이 장군이 역모를 꾀한 두 마리의 용과 싸워서 이긴 뒤 역적이 나올 지세의 기운을 칼로 잘랐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예각으로 뻗어나온 지형 끝에 세워진 정자가 남이정을 끼고 산책로가 놓여있다.


돌로 지은 정갈한 탑 하나가 이리도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을까요. 병풍처럼 펼쳐진 석벽을 끼고 흘러가는 반변천의 물길을 굽어보는 자리. 거기에 1000년 넘게 서 있는 석탑 한 기. 경북 영양의 봉감모전오층석탑입니다. 화려한 기교 없는 담박한 자태. 그 품새 한 번 정갈하기 그지없습니다. 탑 곁에는 잎을 다 떨군 느티나무가 활개치듯 서 있고, 늙은 감나무 가지 끝에는 까치밥으로 남겨둔 연시감 두어 개가 매달려있습니다. 반변천의 물소리가 잦아들면서 주위는 침묵으로 적막한데 기울어가는 초겨울 볕을 받아 탑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습니다.

이 계절에 경북 영양으로 떠나는 까닭의 팔할 쯤은 이 탑을 보기위함입니다. 국보로서의 값어치 따위는 몰라도 좋습니다. 어차피 탑에 얽혀 전해지는 이야기도 변변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눈썰미만 좀 있다면, 대번에 눈치채실 것으로 믿습니다. 보탤 것도, 뺄 것도 하나 없는 간결한 탑의 자태가 얼마나 단정한지. 그리고 이런 단정한 탑이 주변경관과 어우러져 얼마나 그윽한 공기를 만들어내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영양의 반변천. 중중첩첩(重重疊疊)의 영양 땅을 굽이쳐 흐르는 반변천 물길은 척금대의 곡강팔경(谷江八景)과 옥선대, 비파담, 세심암, 초선대와 같은 명소들을 두루 만들어 냅니다. 그 중 최고의 명승이라면 반변천과 청기천이 만나는 남이포와 선돌 일대입니다. 물길이 Y자로 합수하는 지점에 여러 쪽으로 잘라낸 케이크의 한 조각처럼 예리한 형상을 한 남이포의 모습이나 물 건너 쪽에 우뚝 솟아 그 형상을 바라보는 선바위의 풍경은 비슷한 곳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합니다.

여기다가 무속의 기운으로 출렁이는 일월산을 보탭니다. 혹 서정주 시인의 첫시집 ‘화사집’의 시 ‘신부’를 아시는지요.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저를 버리고 간 신랑을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기다리고 있다가 그만 재가 돼서 폭삭 무너지고만 신부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 신부의 이야기가 바로 일월산에 깃든 것이더군요. 첫날밤을 보내지 못한 ‘황씨부인’을 기리는 사당이 일월산의 어깨쯤에 있었습니다. 사당 앞에다 차를 멈추고 눈 흩뿌리는 산길을 타박타박 걸어 당도한 일월산 일자봉의 정상. 뼈대를 드러낸 겨울 산들이 우우 몰아치는 눈발 속에서 힘차게 산맥으로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반변천의 물길이 휘어 흐르는 자리에 1000년이 넘도록 우뚝 서 있는 영양의 봉감모전오층석탑. 초겨울의 정적 속에서 단정하게 서 있는 탑은 주위 풍경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화려한 꾸밈은 없지만 보면 볼수록 장대한 위용과 그윽한 자태에 감탄하게 된다.



# 단정하면서 그윽한 아름다움이 거기 있다

경북 영양의 반변천 물길을 낀 넓고 야트막한 구릉. 물 건너편에 낮은 병풍처럼 석벽을 둘러친 곳. 거기에 그 탑이 있다. 봉감모전오층석탑. 먼저 그 이름부터 풀어보자. 우선 ‘봉감’이란 탑이 선 마을의 이름. ‘모전(模塼)’이란 ‘전탑을 모방했다’는 뜻이다. 전탑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한다. 그런데 이 탑은 돌을 흙으로 구운 게 아니라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내 전탑처럼 지었으니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오층석탑’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다섯층을 가진 석탑이란 뜻이다.

벽돌 모양의 돌로 쌓아올린 탑은 화려하지 않다. 높이 11m의 당당한 체구를 가진 탑은 석가탑처럼 유려하지도 않고, 다보탑처럼 귀족적인 품격을 가진 것도 아니다. 봉감모전오층석탑은 날렵한 풍모의 이런 탑과는 미감이 전혀 다르다. 탑의 표정은 어찌 보면 무뚝뚝하다. 하지만 소박하면서 간결한 형태가 더없이 단정하다. 붉은 기가 도는 흑회색의 기운도 자태와 썩 잘 어울린다. 주변은 너른 구릉의 평지가 펼쳐져 있고, 탑 앞쪽에는 까치밥을 매달고 있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뒤편에는 나뭇잎을 다 떨군 당당한 느티나무 거목이 풍경을 돋보이게 한다.

뒤로 여러 발짝 물러서서 탑을 바라보면 너른 들에 1000년이 넘도록 서 있는 석탑과 몇 그루 나무들, 그리고 반변천 건너로 뼈대를 드러낸 갈모산 석벽의 풍경까지 합쳐지면 그야말로 그윽한 정취를 빚어낸다. 억새를 두른 반변천의 물길의 흐름은 침묵처럼 유장한데, 먹이를 찾는지 건너편 산자락의 노루 울음소리만 간혹 물을 건너온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통일신라시대 때의 탑의 모습은 어땠을까. 탑의 각 층의 낙수면에는 기와가 곱게 입혀졌을 것이고, 네 귀 끝에는 바람에 뎅그렁거리는 풍경이 매달려있었을 것이었다. 오랜 세월에 기와는 부서졌고, 풍경은 떨어져 나갔지만 이런 장식 하나 없이도 탑은 이렇듯 아름답다.

영양 땅에는 모전탑이 두 기가 더 있다. 우리 땅에 남아있는 모전탑이 모두 10기라는데, 그 중 세 기의 탑이 영양에 있는 셈이다. 봉감모전석탑에 이어 꼽을 수 있는 것이 삼지리모전삼층석탑이다. 산자락의 중턱쯤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탑은 암반 위에 굴러내린 큰 바위를 석탑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석탑을 절묘하게 지어 올렸다. 지금은 이층만 남아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바위로 쓴 기단의 높이가 더해져 제법 웅장한 맛을 낸다. 현리에도 ‘현동모전오층석탑’이 있다. 7m에서 한 치쯤 빠지는 높이라 봉감의 것보다 장대한 맛은 훨씬 덜하지만, 문주석에 새겨진 당초문양이 눈길을 끈다.

기왕 탑 구경을 나섰다면 현일동삼층석탑까지 함께 둘러보자. 31번 국도의 고가도로 아래쪽의 너른 들에 동그마니 놓여있는 이 탑은 몸체에 새겨진 팔부중상과 사천왕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마모되긴 했지만 돋을새김이 아직도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면, 처음 새겨졌을 때는 얼마나 더 정교하고, 빼어났을까.

일월산의 일자봉에 오르면 산맥의 능선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리망산이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

사량도의 지리망산과 불모산을 통틀어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달바위봉에서 암봉 능선을 타고 내려서는 구간. 사방이 푸른 바다이고 발밑으로는 대항의 아늑한 포구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반팔 옷을 입고 호기롭게 등반을 시작한 스위스에서 왔다는 관광객도 위태위태한 암봉 구간에서는 오금이 저리는지 자주 걸음을 멈춰 섰다.


공룡 등판의 거대한 비늘처럼 일어선 바위의 갈기. 그 위로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암릉 길을 균형을 유지하며 걷는 일은 마치 남쪽 바다를 헤엄치는 것 같았습니다. 두 팔을 날개처럼 펼치니 금세라도 바다와 하늘의 경계로 날아오를 듯했습니다. 여기는 경남 통영의 작은 섬, 사량도에 솟은 지리망산입니다. 

날카로운 암봉을 화관처럼 쓰고 있는 지리망산은 지세부터가 남다릅니다. 섬 안의 산은 물론이고 육지의 내로라하는 산과 견준대도 그렇습니다. 제 모습의 아름다움도 나무랄 데 없지만, 지리망산을 완성하는 것은 이름에 들어간 ‘망(望)’자에서 짐작되듯 ‘조망’입니다. 

‘거기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는 얘기는 아쉽게도 옅은 연무 탓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깎아지른 아슬아슬한 암봉 끝에서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 문득 고개를 들 때마다 와락 달려드는 바다와 포구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적이었습니다. 육지의 시간은 이미 겨울로 건너간 지 오래지만, 남쪽의 섬 사량도에는 아직 떨구지 않은 느티나무 잎에 초록빛이 다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계절 다 두고 구태여 지금 사량도로 건너간 것은 하루하루 겨울에 다가갈수록 차가운 대기로 세상은 더 투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차가워진다는 건 어쩌면 ‘명징해진다’는 뜻. 산정에서 보는 조망의 풍경도 그렇거니와, 세상을 보는 시야도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의 여행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량도로 건너가는 여객선의 갑판 위에서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 하나. 섬도 바다에 솟아 있으니 어쩌면 그것 그대로 ‘산’이 아닐까. 그렇게 길 위에서 되돌아보면 두고 온 일상도 그것 그대로 ‘길’이었습니다.

경남 사천의 삼천포항에서 출항한 여객선 ‘세종 1호’를 타고 사량도로 드는 길에서 마주한 다도해 풍경. 섬 산행은 바다 풍경이 펼쳐지는 등반도 등반이지만, 배를 타고 섬으로 드는 낭만적인 여정의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 지리망산이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

통영의 작은 섬 사량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유다. 산림청이 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지리망산’의 명성 때문이다. 그러니 ‘사량도에 간다’면 그건 그대로 지리망산에 오른다는 뜻이 된다. 면류관 같은, 혹은 물고기 등지느러미 같은 암봉을 이고 있는 사량도의 산에 ‘지리’란 이름이 붙여진 것을 두고 ‘거기 서면 지리산이 보인다’는 해석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외지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와 그 산을 오르내린 뒤에 붙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지리망산’이란 이름이 붙은 연유부터 이야기하자. 사량도 지리산의 본래 이름은 육지에서 가장 높은 산인 지리산을 뜻하는 ‘지리(智異)’가 아닌 ‘지리(池里)’였다. 섬 남쪽의 돈지(敦池)마을에서 북쪽의 내지(內池)마을 사이에 솟구쳐 올랐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육지에서 몰려든 등산객들은 사량도의 지리산(池里山)이란 이름에서 당연히 지리산(智異山)을 떠올렸겠고, 두 산의 공통점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장식처럼 솟은 암봉의 사량도 지리산은 거대한 육산인 지리산과는 산세로 보나 위용으로 보나 닮은 게 없다. 그래서 결국 찾아낸 것이 ‘맑은 날 사량도 지리산(池里山)에 오르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는 이야기였을 것이고, 산 이름도 지리산이 보인다는 뜻으로 ‘지리망산(智異望山)’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다가 아예 요사이는 육지의 산과 똑같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 사량도의 산은 지리망산이 아닌 불모산 혹은 달바위산으로 불러야 옳다. 대개 능선으로 몇 개의 산이 이어진 경우, 가장 높은 산의 것을 대표 이름으로 삼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게다가 진짜 거기서 지리산이 보이는지도 알 수 없다. 지리망산의 높이는 398m로 능선으로 이어진 불모산의 달바위봉(400m)보다 해발고도가 2m가 낮다. 그렇다고 지리망산에서의 조망이 불모산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달바위봉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섬의 풍경이 낫다면 더 낫다. 그럼에도 지리망산이란 이름이 앞서는 건 아마 육지의 지리산 명성에 힘입은 때문이리라.

# 공룡의 등비늘 같은 암봉의 화려함

사량도에 닿는 배는 경남 통영의 가오치항에서도, 사천의 삼천포항에서도, 고성의 용암포 선착장에서도 뜬다. 사량도가 속한 행정구역이 통영이니 가오치항에서 뜨는 배편이 가장 잦긴 하지만, 삼천포항이나 용암포 선착장에서 뜨는 배편도 하루 서너 번은 된다. 대개의 섬들이 행정 지원을 받는 배편 하나로 겨우 육지와 드나드는데, 사량도는 육지 세 곳과 연결되는 배편을 갖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그건 그만큼 지리망산을 찾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륙의 내로라하는 명산을 다 놓아 두고 등산객들이 사량도로 들어가 지리망산을 찾아가는 건 공룡 등판의 거대한 비늘 같은 등줄기에서 좌우로 아찔한 직벽 아래 바다를 두고 아슬아슬 걷는 맛이 그만이기 때문이다. 지리망산은 자칫 한 발만 헛디뎌도 ‘그걸로 끝’일 것만 같은 현기증 나는 아찔한 산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말갈기 같은 암봉의 거친 능선을 걷는 내내 사방으로 터진 조망이 빼어남은 더 말할 게 없다. 섬의 산은 풍광은 빼어나지만 대개 코스가 짧아 아쉬운데 지리망산은 400m를 넘기지 못하는 높이에도 종주 등반으로 능선을 이어붙이면 4시간 이상의 제법 벅찬 산행 코스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거기에다 지리망산엘 가는 이유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섬으로 떠나는 낭만적인 행로가 등산의 부록처럼 따라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리망산은 육지의 내로라하는 다른 산들이 황량한 풍경을 갖게 되는 겨울철이 특히 매혹적이다. 한겨울에도 남쪽 바다의 섬이라 바람에 훈기가 느껴지는 데다 활엽수들이 잎을 떨구고 난 뒤, 눈이 시도록 푸른 바다와 말갈기 같은 암봉을 오히려 더 근사하게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리망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다. 칼날 같은 바위능선을 네 발로 기어가야 하는 구간이 적지 않다.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하는 코스도 있고, 바위 직벽을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구간도 있다. 위험 구간을 우회하는 코스가 올 들어 새로 놓여서 길이 좀 순해지긴 했다지만, 아무래도 더 빼어난 절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는 이른바 ‘위험 구간’에 들어섰을 때다. 위험 구간에 올라서 능선의 칼바위를 붙잡고 발끝으로 온몸의 균형을 유지하다 보면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남쪽의 땅끝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사량도까지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지리망산을 찾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은….

제주 올레 마지막 길에서 만난 세 장의 그림

제주 올레길은 섬을 한 바퀴 도는 화살표를 따라 분명한 코스가 나있지만, 그 길을 벗어나 제주 여행에서의 ‘걷기’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래서 이즈음 제주에서는 올레길을 벗어난 곳에서도 걷기 여행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사진은 해질 무렵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새별오름 능선을 걷는 도보 여행자의 모습.


2007년 9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에서 출발한 제주 올레길이 이 달말쯤 제주 섬을 한 바퀴 다 돌아 5년 만에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당도해 마침표를 찍습니다. 시흥리와 종달리라니 시작과 끝의 마을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올레길이 출발하는 시흥리는 시작을 의미하는‘비로소 시(始)’ 자를 쓰고, 섬을 다 돌고 도착하는 종달리는 ‘끝 종(終)’ 자를 쓰니 말입니다.해안과 중산간, 마을의 흐려진 길을 한데 붙여 이어낸 올레길은 참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습니다.

먼저 그 길은 ‘걷는다’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고, ‘걷는 일’이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목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멀미 나는 속도로 살아온 도시 사람들이 그 길 위에서 만난 것은 아름다운 경관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위안과 치유를 만났습니다.

가끔은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서서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 길 위에서 였습니다. 무릇 여행이라면 그곳의 사람들과 따스하게 교유해야 한다는 것도 그 길에서 배웠습니다.여행의 방법부터 삶의 방식까지…. 올레길이 우리들에게 축복처럼 선사한 것은 너무도 많습니다.

완전 개통을 앞두고 올레길의 마지막 구간 21코스를 미리 둘러봤습니다. 코발트빛 바다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우도와 성산일출봉, 비스듬히 기운 가을볕을 받아 아름답게 물결치는 억새군락, 해가 넘어가고 난 뒤 핏빛 노을을 배경으로 중산간의 구릉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 청명한 가을날, 올레길과 오름을 딛고 가면서 제주에서 만나고 온 것들입니다. 여기다가 내친김에 몇 곳의 코스를 더 돌면서 차곡차곡 쌓여진 이야기도 찾아가 봤습니다.



# 제주 올레 마지막 길에서 만난 세 장의 그림

제주 동쪽에서 놓기 시작한 올레길이 5년여 만인 오는 24일 섬을 한 바퀴 돌아 출발지점으로 돌아온다. 총연장 400㎞가 넘는 올레길의 완전 개통이 목전에 다가왔다. 

마지막 길, 그 얘기부터 하자. 올레길 마지막 구간인 21코스는 섬 동쪽의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끝이 난다. 올레길이 끝나는 지점의 마을 이름 ‘종달(終達)’을 한자로 풀자면 ‘끝에 다다르다’는 뜻. 그러고 보니 올레길 제1구간이 시작되는 곳은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다. ‘시흥(始興)’의 ‘시’가 시작을 의미하니 올레길의 시작과 끝은 일찌감치 마을 이름에 담겨 있는 셈이다. 

마을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몇 가지.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고종달이란 사신을 제주에 보냈는데 그가 처음 당도한 곳을 종달마을이라 이름 붙였다는 얘기. 또 제주 서쪽 두모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머리 두(頭)’ 자를 써서 제주도의 머리이고, 종달리는 ‘마칠 종(終)’ 자를 써서 제주도의 꼬리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제주 땅을 다스리던 목사(牧事)가 부임해 오면 지형도 익히고 민심도 살필 겸 섬을 한 바퀴 도는 ‘탐라순력’을 나섰는데, 그 출발 지점과 끝의 마을에 시와 종 자를 넣었다고도 전한다. 

제주 올레 21코스는 제주 해녀박물관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해안을 따라 별방진과 각시당, 토끼섬 앞과 하도해수욕장을 지난다. 제주의 해안 풍경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만 이 구간에서 최고의 풍경을 보여주는 곳은 바로 해안 쪽에 딱 붙어 솟아오른 오름 지미봉이다. 지미(地尾)란 이름은 ‘땅의 꼬리’란 뜻. 올레길 마지막 구간으로 어찌나 딱 맞는 작명인지, 길이 여기까지 당도하길 기다려 이름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제법 가파른 사면을 올라 지미봉의 정상에 서면 도대체 어디다 시선을 둬야 할지 망설여질 법하다. 사방 360도로 가장 ‘제주다운 풍경’을 담은 세 장의 그림이 펼쳐지니 말이다. 

먼저 바다 쪽으로 보이는 한 장의 그림.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코발트빛 바다를 앞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풍경. 수심에 따라 채도가 달라지는 눈부신 청색의 바다 위로 고깃배들과 유람선들이 오가고, 내륙 안쪽에는 겨울의 초입에도 성성한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밭들이 펼쳐져 있다.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면 이번에는 두 번째 그림 한 폭이다. 한라산을 정점으로 제주 동쪽의 오름군락들이 첩첩이 겹쳐진다. 멀찌감치 물러서서 바라보는 오름의 부드러운 선들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여기서 다시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줄곧 딛고 온 하도 쪽을 바라보면 세 번째 그림이다. 바다 쪽으로 불쑥 내민 곶 형태의 지형에 바다를 배경으로 빨간색과 파란색의 지붕을 얹은 집들이 ‘동화 속 세상’처럼 펼쳐진다. 한자리에서 제주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 세 장이 펼쳐지니 여기서 더 무엇을 바랄까. 지미봉은 이른바 올레길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데 추호의 모자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