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12, 2014

사이렌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다

임진강의 물길을 따라 동호인들이 카약을 즐기는 모습. 한탄강과 임진강은 카약과 래프팅의 명소다.

경기 연천. 이곳은 누대에 걸친 전쟁의 땅입니다. 
삼국시대 이래로 그랬습니다.
칼과 창이 부딪쳐 불꽃이 튀었고, 총과 대포가 마주보고 불을 뿜었습니다. 
분노와 적대는 모든 것을 부숴버렸습니다. 
접적(接適)의 반목과 아슬아슬한 긴장은 아직도 여전합니다. 
이런 긴장 속에서 구태여 그곳을 찾아간 것은 아직도 버릴 수 없는 평화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연천에서 만난 것은 긴장과 대치 속에서 금단의 공간으로 남아 있는 자연, 그리고 부서져 뒹구는 것과 땅에 묻힌 것들이었습니다. 
전쟁의 상처 위로 켜켜이 쌓인 시간 위로 다시 봄이 찾아왔습니다. 
북에서 발원한 임진강과 한탄강이 직벽의 주상절리 아래로 유장하게 흘러내렸고, 삼각형 ‘지뢰’ 표지판 너머로 강변의 수몰 버드나무의 새잎이 연둣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허물어진 고구려의 성곽과 신라 마지막 왕릉, 그리고 고려 마지막 왕족의 기구한 삶, 아직도 선명한 총탄의 흔적들…. 
이곳의 겨울은 언제 끝나게 될까요. 
뒤늦게 당도한 봄볕이 저리도 환한데 말입니다.

연천 태풍전망대로 가는 길에서 만난 민간인통제선 내 임진강의 모습. 접적지역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강변의 수몰버드나무들이 이제 막 신록을 틔워올리고 있다. 

# 사이렌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다

‘엎어진 밥상’. 거기서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의정부와 동두천을 지나 연천 땅으로 들어섰을 때의 느낌이 그랬다. 마을은 어수선했으며 유달리 가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둥구나무 한 그루쯤 서 있는 깊고 아늑한 마을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정돈되지 않은 마을 주변은 농기구와 비료 부대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시멘트 블록의 오래된 가게 건물은 남루했으며, 새로 지은 집이나 건물은 상당수가 가건물이었다. 길은 좁았고 시멘트 포장도로에는 자주 험상궂은 군용트럭들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줄지어 달렸다.

아마도 전쟁 탓이리라. 전란의 와중에 북녘 땅에서 내려와 고향과 가장 가까운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들은 돌아갈 날만을 손꼽았을 것이었다. 고향을 북에 두지 않은 이들도 전쟁의 기억과 반복되는 위협으로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연천은 어쩌면 전쟁의 상흔이 깊어 아직도 ‘정주(定住)의 땅’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메고 임진강변의 둑에 올라섰을 때 난데없이 ‘앵∼’하고 사이렌이 울었다. 길게 이어지는 사이렌 소리에 더럭 겁부터 났다. 요즘 세상에 전쟁의 참화는 전후방을 가리지는 않겠지만 접적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그 징후를 알 수 있을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공포였다. 강둑 아래서 밭을 다듬던 아주머니가 ‘쉿’하고 손가락을 입에 댔다. ‘(사이렌이) 네 번 울면 산불이 났다는 신호’라고 했다. 숨죽여 숫자를 세었다. 다행히 사이렌은 네 번 울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근처에서 작은 산불이 난 모양이었다.

연천에 다녀온 이튿날 밤늦게 스마트폰에 속보 알람이 울렸다. 연천의 임진강 ‘필승교’의 수위가 3m로 높아져 대피령이 내려졌다는 뉴스였다. 연일 북한의 전쟁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시에 물을 흘려보내는 ‘수공(水功)’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높아진 수위는 그러나 북한 지역에 내린 폭우 때문이었다. 연천 주민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인지 모르겠으되 외지 사람들에게는 사이렌과 속보는 두려움에 가깝다. 정주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엎어진 밥상’ 같은 마을의 분위기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이리라.

경기 연천의 차탄천을 끼고 있는 주상절리 협곡. 한탄강과 임진강변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 누대에 걸친 전쟁의 땅, 연천

연천은 늘 ‘전쟁의 땅’이었다. 연천에서 가장 앞선 전쟁의 흔적은 임진강을 끼고 있는 고구려성에 남아 있다. 임진강은 고구려와 백제가 한 치의 양보 없이 격돌하던 치열한 격전지였다. 특히 신라·백제 연합군에 밀려 한강 지역에서 패퇴한 고구려가 임진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뒤부터 연천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됐다.

당시 전쟁의 흔적은 임진강변에 남아 있는 고구려성 호로고루성과 당포성, 은대리성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성은 예외 없이 모두 임진강의 본류와 지류의 작은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굳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은 지류에서 밀려온 토사로 강바닥이 높아져 여울을 이루는 자리를 방비하기 위한 것이다. 수위가 낮아진 자리는 바지만 걷어붙이고 강을 건널 수 있으니 침략과 수비의 길목이었다. 고구려와 백제군이, 그리고 6·25전쟁 당시에 중공군들도 성 아래쪽 얕은 여울을 찾아 임진강을 맨몸으로 건너 진격했다.

고구려 성 중에서 한 곳만 고르라면 호로고루성을 추천한다. 임진강변 주상절리의 직벽 위에 세워진 호로고루성은 자태부터 우람하다. 은대리성에 주둔했던 고구려군이 중대급, 당포성이 대대급이라면 이곳 호로고루성은 연대급의 병력이 주둔하던 최전방 사령부였다. 인근에 백화점까지 들어섰을 정도로 번성했던 포구였으나 지금은 갈대밭이 되고만 고랑포가 있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왕릉도 있으니 함께 둘러보기도 좋은 위치다.

당시 고구려의 정복 정신은 ‘헝그리 정신’에서 나왔다. 중국 역사서는 죄다 고구려를 ‘배고픈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렸던 고구려는 그러나 만주와 요동 일대를 장악한 뒤에는 사정이 나아졌다. 그 증거가 호로고루성의 군량창고에서 나왔다. 창고 터에서는 쌀, 콩, 조, 팥 등의 곡식은 물론이고 소, 사슴, 멧돼지 등의 뼈도 나왔다. 발굴 유물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1300g의 밥이 들어가는 거대한 밥그릇. 요즘 밥 한 공기에 들어가는 밥이 300g 남짓이니 4배 이상이나 되는 크기다. 직벽의 주상절리 위에 흙으로 두툼하게 돋워놓은 성루에 오르면 성을 방비하던 근육질의 옛 고구려 병사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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