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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민이 떠나고 난 뒤 청정자연의 원시림이 그대로 남아 있는 늡다리의 칠룡폭포 계곡을 늡다리의 유일한 주민인 김필봉 씨가 내려다보고 있다. 김 씨는 새해가 되면 꼬박 1시간 30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깊은 오지에서의 산골생활 17년째를 맞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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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문화일보가 찾았던 최고의 여행지는 강원 영월의 ‘늡다리’였다. 화전민이 떠나고 난 뒤 40여 년 동안 사람의 발자취가 끊긴 오지 중의 오지. 늡다리는 강원 영월과 경북 봉화, 충북 단양의 경계에 솟은 어래산과 선달산 북쪽 자락의 계곡에 깊이 숨어 있었다. 맑고 청량한 계곡과 원시림의 짙은 숲. 손대지 않은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던 곳. 거기에 김필봉(48) 씨의 집이 있었다. 계곡의 물길을 따라 꼬박 1시간 30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 전기도 없고, 군용 전선으로 위태롭게 놓은 전화선마저도 자주 끊어지는 곳에서 김 씨는 제 먹거리만 거두면서 살고 있었다.
늡다리를 기사로 소개하는 데는 고민이 적지 않았다. 취재 내내 발목을 잡던 생각은 ‘이렇듯 청정한 원시림을 공개했다가 자칫 밀려드는 행락객들로 더럽혀지지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김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자연이 좋다고 해도 여기까지 찾아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태평스러워했다. 결론은 김 씨의 말이 맞았다. 깊은 오지의 청량한 풍경과 함께 김 씨와 보낸 별이 쏟아지던 하룻밤에 대한 기사가 나간 뒤 독자들의 문의는 쇄도했지만, 정작 늡다리를 찾아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계곡을 따라 김 씨의 흙집으로 오르는 산길이며 김 씨 집 주변의 원시림은 빼어나게 아름다웠지만, 그 광경을 보려면 바쳐야 하는 1시간 30분 남짓의 산길 걷기를 감내한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고백하자면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에 앞서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앞섰다. 행락객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는 것을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적막하고 청량한 숲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 2012년 최고의 여행지 목록의 맨 앞줄에 늡다리를 꼽는 이유는, 티끌만큼도 훼손되지 않은 빼어난 자연 풍경과 거기에 기대고 사는 김 씨의 삶이 더없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늡다리가 오래도록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김필봉 씨는 지금 푸근하게 눈이 쌓인 늡다리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쌀이 떨어져 계곡 아래 마을로 쌀을 사러 나왔다가 연결된 전화에서 그는 “늡다리에서의 열일곱 번째 겨울을 보내기 위해 땔감을 넉넉히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늡다리의 겨울 풍경은 과연 어떨까. 궁금하다면 김 씨에게 전화(033-378-7024)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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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에는 의외로 다양한 풍경과 수많은 이야기를 숨겨둔 명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백제 왕궁 터에 기품 있게 서있는 왕궁리 석탑을 찾아간 날에 마침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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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의 왕궁리 석탑 주변의 화사하게 피어났던 벚꽃. 아쉽게도 그 벚꽃을 다가올 봄에는 보지 못한다.
지난 여름 잇따라 내습한 두 번의 태풍으로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적잖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익산을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명소들이 익산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 때의 것인 우람한 왕궁리 석탑이 있고,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컸다는 대숲도 있으며, 그윽한 편백나무 숲도 있고, 꽃잔디 화려하게 피어나는 아늑한 한옥의 찻집에다 금강의 유장한 물줄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치 못지않게 익산에서 감동했던 것은 풍성한 이야기들이었다. 호사가들이 그럴싸하게 꾸며내거나 이리저리 터무니없는 전설 따위를 덧댄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잘 삭은 이야기들이다.
고대국가 백제의 유적인 미륵사지와 왕궁리 석탑에는 물론이거니와 옛 선비가 부모를 위해 세운 제각인 영모정에도, 난데없는 판소리 공연장을 들여놓은 절집 심곡사에도 이야기들이 펄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바위성당과 두동교회, 함라의 돌담마을에도 마치 대하소설과 같은 유장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낭산면의 절집 심곡사와 정정렬 명창에 얽힌 이야기였다. 근세 5명창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정정렬. 말년에 명창으로 우뚝 섰지만 사실 그는 음색도 탁하고 성량도 부족했다. 오죽하면 ‘떡이 목에 걸린 것 같은 거친 소리’라 해서 ‘떡목’이라 불렸을까.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평생 심곡사 등의 절집을 떠돌며 피를 토할 정도로 극단의 수련을 했고 수많은 좌절 끝에 끝내 명창으로 거듭났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승승장구하면서 업적을 이룬 이들도 위대하지만, 이런 삶이 보여주는 감동의 농도는 더 깊고도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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