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12, 2014

금강이 품고 있는 서정과 서사

전북 진안 용담댐 아래 첫 마을인 용담면 송풍리 감동마을의 길 끝에서 마주하고 섰던 금강의 풍경. 지난가을 억새의 밝은 갈색과 연초록 신록이 한데 어우러진 강변에서 ‘색색의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를 떠올렸다. 이즈음의 금강 상류에서 만나는 신록의 색감은 이렇듯 아름답다.

봄꽃이 아우성처럼 피고 진 자리에는 이제 고요한 신록이 넘실거립니다. 여린 순이 빚어내는 연둣빛 환한 신록. 그게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쯤은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일이지요. 이즈음의 신록이야 눈 돌리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만, 그중 아름다운 신록은 따로 있답니다. 바로 강변의 신록입니다. 강변에서 나무들이 저마다 채도가 다른 초록 이파리를 매달고 반짝거리는 모습에서는 만춘(滿春)의 서정이 느껴집니다. 신록의 강변 풍경이 가장 아름답기로는 금강 상류만 한 곳이 없습니다.

무르익은 봄날의 금강은 비단(錦) 강(江)이란 이름에 넉넉히 값을 하고도 남습니다. 충남 금산에서 금강의 물길을 거슬러 전북 무주를 거쳐 진안까지 잦은 봄비로 초록이 짙어가는 금강변의 길을 달렸습니다. 물굽이를 돌아 수채화 물감처럼 초록이 번지는 강변 풍경을 만날 때마다 ‘와아∼’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나른한 봄 안개 속에서 저기 강 굽이 너머 깊은 숲속에서 소쩍새 소리까지 더해지는 곳. 아, 여기 금강이야말로 봄을 만나고 또 떠나보내기에 최고의 장소임에 틀림없습니다. 꽃으로 시작했던 봄이 신록으로 이어지며, 이렇게 또 봄날은 갑니다.

잔잔한 수면 위에 산 그림자를 찍어내고 있는 용담호의 모습. 이른 아침 물안개에 휩싸인 호수를 끼고 즐기는 드라이브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 금강이 품고 있는 서정과 서사

서정과 서사. 금강의 물줄기는 이 두 가지 정반대의 그림으로 확연하게 나뉜다. 백제의 옛 도시 부여와 공주를 가로질러 군산 하구에서 탁류가 되는 금강 하류가 ‘서사’라면, 전북 진안에서 발원해 무주와 충남 금산 땅을 적시며 흐르는 금강의 상류 구간은 ‘서정’이다.

일찍이 시인 신동엽은 금강을 일러 “예로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시 ‘금강’ 중에서)이라 했다. 패망한 백제의 옛 땅과 동학혁명의 격전지 우금치를 지나 일제 수탈의 거점이었던 군산까지 흘러가는 금강의 하류. 거기서 시인은 질곡의 시간을 흘러가는 서사를 읽어낸 것이었다.

금강 하류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비장함이다. 백제의 빛나는 영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불온한 꿈이 이 강변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진압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이런 비장미를 만나려면 가을, 그것도 노을에 강물이 붉게 물드는 해 질 녘이 맞춤하겠다.

금강의 상류는 분위기는 그러나 하류와는 사뭇 다르다. 전북 진안에서 용담호를 거쳐 무주로, 금산으로 이어지는 금강변은 지금 여린 봄꽃의 연분홍과 연둣빛의 무성한 잎들의 색감으로 흠뻑 젖어 있다. 저 스스로 길을 찾아 흐르는 강변에는 반짝거리는 초록의 생명들로 가득 차 있다. 흐르는 물소리의 틈으로 새들이 날아오르고, 때 이른 소쩍새 울음이 끼어드는 곳. 이런 서정적인 봄날의 나른한 강변 풍경을 시인이 만났더라면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무르익은 봄의 신록이 가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곳은 누가 뭐래도 강변이다. 그렇다고 아무 강에서나 이런 서정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직 제 몸 더럽힘 없는 상류 쪽에서 저 스스로 길을 찾아 흐르는 그런 강에, 몸집을 불리지 않고 소박한 시멘트 다리로 금세 건널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강에 봄날의 기장 아름다운 풍경은 숨어 있다. 이런 강의 풍경이 여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비단(錦) 강(江)’이란 이름에 능히 값하는 금강 물줄기의 상류다. 

# 아름다움은 길이 끊기는 곳에 있다

금강 상류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길이 끊기는 곳에 있었다. 금산 쪽에서 지도를 펼치고 금강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보니 예외 없이 그랬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늘 길 끝에 숨겨져 있었다. 

일부러 길을 지워 숨긴 것이 아닐진대 어김없이 그런 걸 보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질료란 다름 아닌 ‘간섭하지 않음’인 듯했다. 그러니 금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록의 풍경을 찾아가는 것은, 지도를 펴놓고 금강 상류 쪽의 물길을 짚다가 길이 끊긴 곳을 찾아가는 일에 다름 아니다.

금강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을 금산의 적벽강에서 시작했다. 적벽강이라면 시루떡처럼 바위지층이 쌓여 있는 전북 부안의 채석강과 이어진 해안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내륙 깊숙한 금산군 부리면 수통리에도 적벽강이 있다. 금강의 물줄기 한쪽에 적벽이 솟아있는데, 부안의 적벽강에다 댄다면 그 규모며 위용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저 여름이면 물놀이 행락객들이 찾아드는 한적한 강변일 뿐이다. 

위부터 배꽃을 담장처럼 두른 충남 금산 큰방우리 마을의 단정한 집들, 용담댐 아래 섬바위 부근 강변의 버드나무 무성한 습지, 금강을 끼고 이어지는 전북 무주의 잠두마을 길.
이즈음 같은 봄날에는 그러나 이곳의 주인공은 적벽이 아니다. 적벽강에는 둥글둥글한 강변 자갈을 끼고 포장도로가 이어지는데, 그 길이 끊기는 지점쯤에서 상류 쪽을 올려다보면 온통 신록으로 물든 그림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강변 버드나무와 관목들은 저마다 다른 채도의 연둣빛을 뿜어내고 있고, 산자락에는 산벚꽃들이 아직 환하다. 거기서 만나는 건 눈부신 봄날의 고요와 평화다.

적벽강의 바위벼랑 쪽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짚어 ‘한바위’까지 왕복 1시간 남짓의 가벼운 등산을 다녀오는 걸 추천하지만, 여기서는 구태여 할 일을 찾지 않아도 좋겠다. 강 건너편의 신록으로 물든 강변을 바라보면서 자그락거리는 강 자갈을 밟으며 산책을 해도 좋고, 초록의 물그림자가 드리운 수면 위로 물수제비를 떠도 좋겠다. 아니 그저 강변에 앉아 건너편 산중에서 들리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봄볕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다.

# 복사꽃 만개한 강변 마을의 풍경

적벽강에서 급한 비탈과 가로막는 숲으로 길이 끊겨 닿지 못하는 저쪽 금강 상류 쪽은 금산군 부리면 방우리다. 급하게 굽이쳐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 때문에 섬이 되려다가 아슬아슬 한쪽으로 내륙에 걸치고 있는 방울 모양의 지형이라 해서 방우리란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적벽강을 들렀다가 찾아가는 다음 금강변 신록의 명소는 방우리다.

방우리는 충남 금산 땅이지만, 거기에 닿으려면 전북 무주를 거쳐 외길을 따라 들어가야만 한다. 방우리로 향하는 길은 강변을 바짝 끼고 이어져 있어 그 정취만으로도 환상적이다. 강변의 신록은 말할 것도 없고, 구릉 곳곳이며 강변으로 복사꽃까지 만개해 있어 운치를 더한다.

방우리 마을은 ‘큰 방우리’와 ‘작은 방우리’로 나뉘어지는데, 두 곳의 풍경이 사뭇 다르다. 무주의 내도교를 지나서 방우리 이정표를 따라 강둑을 달리다보면 두 길이 위아래로 갈린다. 아래쪽 길을 따라가면 큰 방우리이고, 가파른 위쪽 길을 택하면 작은 산을 하나 넘어서 작은 방우리에 닿는다. 큰 방우리는 강변을 끼고 함석 지붕을 이고 있는 흙벽의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20여 호 남짓의 작은 마을은 이름 앞에 붙여진 ‘크다’는 말이 무색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마을도 드문드문 집들이 들어선 작은 방우리에 대면 큰 건 확실하다.

큰 방우리에서 봐야 할 것은 강변을 끼고 있는 마을의 정취다. 담벽이 무너진 폐가들도 적잖지만, 마을 분위기는 단정하기 이를 데 없다. 오래되고 낡은 집들이 모여 빚어내는 단정한 느낌에서 거기 깃들이어 사는 사람들의 품성이 느껴진다. 

가파른 산길을 넘어 당도하는 작은 방우리는 제법 너른 들을 끼고 있는 강변 마을. 부드럽게 휘어져 흐르는 금강변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곳이다. 한창 복사꽃이 만개한 강변의 들을 거닐어도 좋겠고, 강가로 내려서 건너편의 신록을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끊어진 곳까지 가서 물길을 따라 적벽강 쪽으로 이어진 비포장 흙길을 따라 내키는 만큼 걷다가 되돌아오는 것도 봄을 만끽하는 훌륭한 방법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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