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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 ‘로스트밸리’ 사파리 코스 안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인 ‘평화의 언덕’이 그 해답을 보여준다. 평화의 언덕에는 육식동물인 치타와 초식동물 코뿔소가 함께 생활한다. 스웨덴의 한 동물원에서의 성공적인 사례를 적용한 것이지만, 때때로 치타와 코뿔소가 무리를 지어 대치하는 바람에 사육사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
지금껏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사파리’가 새로 선보입니다. 펜스도 철망도, 장벽도 없이 바위 협곡과 수로 호수와 폭포에서 동물들이 뛰노는 곳. 이곳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것을 탐하는 맹수들의 포효가 아니라 조화와 평화, 그리고 공존을 보여주는 동물들의 세상입니다. ‘로스트밸리’. 이름하여 ‘잃어버린 계곡’입니다.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이나 평원이 고향인 20종류의 150마리 동물을 들여놓은 ‘인위의 공간’이긴 하지만, 이곳의 동물들은 생태적인 습성을 배려해 자연스럽게 조성한 사파리 구역 안에서 저마다 제 본능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맹수사파리에서 만나는 간담 서늘한 위협의 이빨이나 발톱 같은 짜릿함은 없습니다. 대신 동물과 동물이, 혹은 인간과 동물들이 서로 방해받지 않은 채 영역을 넘나들며 무심한 듯, 혹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지켜봅니다.
이렇게 서로 어울려 사는 동물들의 모습이 특별한 건, 동물을 유리벽이나 철창 너머 ‘구경거리’의 대상으로 대우하지 않고, 공존이란 소중한 가치를 드러내려 한 의도가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사파리의 곳곳에서 코뿔소와 치타가, 기린과 세이블앤틸롭이, 바바리양과 흰오릭스가 함께 살아가고, 이런 동물들 사이로 이따금씩 유리 없는 창을 가진 수륙양용차가 지나갑니다. 호기심 많은 기린은 차 안으로 자주 머리를 들이밀어 기웃거리고, 바위를 타고 앉은 산양은 겅중겅중 바위를 뛰다가 멈춰 서서 관람객들과 눈을 맞춥니다.
어쩌면 이런 공간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꿈의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가 동화 같을 리 없을 것이고, 동물을 가둬 놓은 인간의 이기를 합리화하는 것도 좀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래도 좋습니다. 언젠가 인적 드문 깊은 숲길을 걷다가 고라니 한 마리와 딱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가슴 떨림, 혹은 감동. 로스트밸리에서는 그 비슷한 것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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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진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바바리양, 관학, 얼룩말, 세이블앤틸롭. 가운데는 일런드. 아래 큰 사진은 세계적으로 단 300마리만 있다는 백사자의 당당한 위용. 국내에서는 에버랜드가 유일하게 크림색 백사자 6마리를 보유하고 있다. |
# 치타와 백사자가 동물원에서 사라진 까닭
지난해 10월쯤의 일이었다. 에버랜드 주토피아(동물원)에서 치타 두 마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팽팽한 긴장으로 몸을 잔뜩 낮춘 채 우리 안을 불안하게 오가던 놈이었다. 그 뒤로 6개월 동안 에버랜드에서 치타를 본 관람객은 없었다.
사라진 건 치타만이 아니었다. 이보다 한참 앞서 전 세계에 300마리밖에 없다는 백사자 3마리도 몸을 감췄다. 명물 중의 명물이었던 흰 갈기의 백사자를 동물원 안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뒤이어 거대한 몸집의 코끼리도, 쿵쿵 땅을 구르던 코뿔소도 차례로 사라졌다. 급기야 무리를 이뤄 겅중겅중 뛰며 관람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열두 마리의 기린까지 한꺼번에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필시 동물원 어디에선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일인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이제 그 비밀이 공개됐다. 에버랜드의 ‘로스트밸리’ 프로젝트. 로스트밸리는 에버랜드가 무려 500억 원을 투입해 2년여간의 준비작업을 거쳐 오는 20일 운영을 시작하는 신개념의 사파리다.
기존의 ‘사파리월드’가 맹수 중심의 사파리라면, 그 옆에 들어서는 로스트밸리는 초식동물을 중심으로 맹수를 함께 보여주는 사파리다. 에버랜드는 여기에 개장 이래 최고의 거액을 투자했다. 에버랜드가 로스트밸리에 전력을 추구한 것은 세계적인 테마파크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국내 진출 움직임에 맞서 야심 차게 준비한 회심의 빅 카드였기 때문이다.
동물원에서 사라진 맹수와 초식동물은 지난 2년여 동안 조성한 4만1000㎡(1만2400여 평)의 로스트밸리 공간으로 비밀리에 옮겨져 새로운 거처에 적응하고 있었다. 애초에 사라진 것보다 동물의 숫자도 불어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싱가포르에서 새로 데려온 놈들이었다.
치타는 두 마리가 더 들어와 도합 네 마리로 늘었고, 백사자는 세 마리를 더해 여섯 마리가 됐다. 코뿔소도 두 마리에서 네 마리로 늘었다. 코끼리도 스리랑카에서 두 마리가 더 들어왔다.이뿐만 아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산양을 비롯해 굵은 뿔을 가진 무플론, 목 아래로 멋진 갈기를 가진 바바리양, 날카로운 뿔을 가진 세이블앤틸롭 등도 사파리의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에버랜드는 사파리와 인연이 깊다. 에버랜드의 전신은 ‘자연농원’. 지금으로부터 꼭 37년 전인 1976년 4월 18일 개장한 자연농원의 최고 명물은 단연 ‘라이언 사파리’였다. 지금처럼 버스를 타고 사자를 보는 사파리였다. 한데 너나없이 궁핍했던 시절에 사자를 외국에서 귀한 달러로 사 볼거리로 들여온다는 게 눈총을 받을 일이었던 모양. 자연농원 개장 직후 창경원보다 비싼 입장료에 대해 비판 여론이 일자 급기야 박준규 당시 공화당 정책위의장이 나서서 한마디했다. “도대체 사자를 왜 들여왔는지 모르겠다….” 지금 되돌아보면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다.
# 가로막는 ‘유리’가 없다는 것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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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밸리’의 가장 큰 특징은 ‘수륙양용차’를 타고 물과 땅을 오가며 동물을 본다는 점. ‘말하는 코끼리’ 코식이의 뒤쪽으로 수륙양용차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로로 진입하고 있다. |
로스트밸리에 구태여 수륙양용차를 들인 것은 바위와 물길, 초지 등으로 다양하게 설계된 사파리 공간을 넉넉하게 주파할 수 있다는 강점도 있지만, 그보다 사파리 관람의 즐거움에 ‘탈것’의 재미를 보태주기 위한 것. 실제로 바퀴로 땅을 달리다가 일순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로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은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하다.
낯선 탈것인 수륙양용차는 여러 가지 매력이 있지만 그중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라면 ‘창(窓)’이다.
차량의 관람창에는 유리가 없다. 관람자와 동물 사이에 아무런 차단 장치가 없다는 건 그야말로 ‘감동’이다. 그게 뭐 대수냐 싶겠지만, 차량에 탑승해 보면 그 매력을 대번에 알게 된다. 게다가 이 차량이 지나는 로스트밸리의 사파리 공간에는 철책이나 우악스러운 우리도 없다. 오래돼 넘어진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거목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해 우리로 삼았고, 맹수들의 공간에서 꼭 필요한 부분에는 작은 관목 형태의 전기선을 꽂아 두었을 뿐이다.
차창에 유리가 없다는 것과 사파리 공간에 우리가 없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유리벽 너머의 우리 속 동물은 그저 ‘볼거리의 대상’으로 다가올 뿐이지만, 아무런 차단 없이 마주하는 동물은 감정이입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면 우리 속에 가둬져 불안하게 서성이는 고라니를 관람하는 것과 호젓한 숲속 오솔길에서 고라니와 딱 맞닥뜨렸을 때의 감동의 차이와 비슷하다.
열린 공간에서 사이를 가로막는 아무런 장치도 없이 동물들과 눈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게 실상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위해 치밀하게 의도된 공간일지라도 말이다.
유리와 우리가 없는 동물과의 조우는 곧 로스트밸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드러낸다. 동물과 인간이 교감하는 생태형 사파리. 이것이야말로 독일 하노버동물원을 설계했던 독일 단펄만사가 에버랜드의 주문을 받아 그려낸 로스트밸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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