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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의 지리망산과 불모산을 통틀어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달바위봉에서 암봉 능선을 타고 내려서는 구간. 사방이 푸른 바다이고 발밑으로는 대항의 아늑한 포구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반팔 옷을 입고 호기롭게 등반을 시작한 스위스에서 왔다는 관광객도 위태위태한 암봉 구간에서는 오금이 저리는지 자주 걸음을 멈춰 섰다. |
공룡 등판의 거대한 비늘처럼 일어선 바위의 갈기. 그 위로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암릉 길을 균형을 유지하며 걷는 일은 마치 남쪽 바다를 헤엄치는 것 같았습니다. 두 팔을 날개처럼 펼치니 금세라도 바다와 하늘의 경계로 날아오를 듯했습니다. 여기는 경남 통영의 작은 섬, 사량도에 솟은 지리망산입니다.
날카로운 암봉을 화관처럼 쓰고 있는 지리망산은 지세부터가 남다릅니다. 섬 안의 산은 물론이고 육지의 내로라하는 산과 견준대도 그렇습니다. 제 모습의 아름다움도 나무랄 데 없지만, 지리망산을 완성하는 것은 이름에 들어간 ‘망(望)’자에서 짐작되듯 ‘조망’입니다.
‘거기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는 얘기는 아쉽게도 옅은 연무 탓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깎아지른 아슬아슬한 암봉 끝에서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 문득 고개를 들 때마다 와락 달려드는 바다와 포구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적이었습니다. 육지의 시간은 이미 겨울로 건너간 지 오래지만, 남쪽의 섬 사량도에는 아직 떨구지 않은 느티나무 잎에 초록빛이 다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계절 다 두고 구태여 지금 사량도로 건너간 것은 하루하루 겨울에 다가갈수록 차가운 대기로 세상은 더 투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차가워진다는 건 어쩌면 ‘명징해진다’는 뜻. 산정에서 보는 조망의 풍경도 그렇거니와, 세상을 보는 시야도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의 여행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량도로 건너가는 여객선의 갑판 위에서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 하나. 섬도 바다에 솟아 있으니 어쩌면 그것 그대로 ‘산’이 아닐까. 그렇게 길 위에서 되돌아보면 두고 온 일상도 그것 그대로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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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사천의 삼천포항에서 출항한 여객선 ‘세종 1호’를 타고 사량도로 드는 길에서 마주한 다도해 풍경. 섬 산행은 바다 풍경이 펼쳐지는 등반도 등반이지만, 배를 타고 섬으로 드는 낭만적인 여정의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
# 지리망산이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
통영의 작은 섬 사량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유다. 산림청이 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지리망산’의 명성 때문이다. 그러니 ‘사량도에 간다’면 그건 그대로 지리망산에 오른다는 뜻이 된다. 면류관 같은, 혹은 물고기 등지느러미 같은 암봉을 이고 있는 사량도의 산에 ‘지리’란 이름이 붙여진 것을 두고 ‘거기 서면 지리산이 보인다’는 해석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외지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와 그 산을 오르내린 뒤에 붙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지리망산’이란 이름이 붙은 연유부터 이야기하자. 사량도 지리산의 본래 이름은 육지에서 가장 높은 산인 지리산을 뜻하는 ‘지리(智異)’가 아닌 ‘지리(池里)’였다. 섬 남쪽의 돈지(敦池)마을에서 북쪽의 내지(內池)마을 사이에 솟구쳐 올랐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육지에서 몰려든 등산객들은 사량도의 지리산(池里山)이란 이름에서 당연히 지리산(智異山)을 떠올렸겠고, 두 산의 공통점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장식처럼 솟은 암봉의 사량도 지리산은 거대한 육산인 지리산과는 산세로 보나 위용으로 보나 닮은 게 없다. 그래서 결국 찾아낸 것이 ‘맑은 날 사량도 지리산(池里山)에 오르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는 이야기였을 것이고, 산 이름도 지리산이 보인다는 뜻으로 ‘지리망산(智異望山)’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다가 아예 요사이는 육지의 산과 똑같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 사량도의 산은 지리망산이 아닌 불모산 혹은 달바위산으로 불러야 옳다. 대개 능선으로 몇 개의 산이 이어진 경우, 가장 높은 산의 것을 대표 이름으로 삼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게다가 진짜 거기서 지리산이 보이는지도 알 수 없다. 지리망산의 높이는 398m로 능선으로 이어진 불모산의 달바위봉(400m)보다 해발고도가 2m가 낮다. 그렇다고 지리망산에서의 조망이 불모산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달바위봉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섬의 풍경이 낫다면 더 낫다. 그럼에도 지리망산이란 이름이 앞서는 건 아마 육지의 지리산 명성에 힘입은 때문이리라.
# 공룡의 등비늘 같은 암봉의 화려함
사량도에 닿는 배는 경남 통영의 가오치항에서도, 사천의 삼천포항에서도, 고성의 용암포 선착장에서도 뜬다. 사량도가 속한 행정구역이 통영이니 가오치항에서 뜨는 배편이 가장 잦긴 하지만, 삼천포항이나 용암포 선착장에서 뜨는 배편도 하루 서너 번은 된다. 대개의 섬들이 행정 지원을 받는 배편 하나로 겨우 육지와 드나드는데, 사량도는 육지 세 곳과 연결되는 배편을 갖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그건 그만큼 지리망산을 찾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륙의 내로라하는 명산을 다 놓아 두고 등산객들이 사량도로 들어가 지리망산을 찾아가는 건 공룡 등판의 거대한 비늘 같은 등줄기에서 좌우로 아찔한 직벽 아래 바다를 두고 아슬아슬 걷는 맛이 그만이기 때문이다. 지리망산은 자칫 한 발만 헛디뎌도 ‘그걸로 끝’일 것만 같은 현기증 나는 아찔한 산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말갈기 같은 암봉의 거친 능선을 걷는 내내 사방으로 터진 조망이 빼어남은 더 말할 게 없다. 섬의 산은 풍광은 빼어나지만 대개 코스가 짧아 아쉬운데 지리망산은 400m를 넘기지 못하는 높이에도 종주 등반으로 능선을 이어붙이면 4시간 이상의 제법 벅찬 산행 코스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거기에다 지리망산엘 가는 이유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섬으로 떠나는 낭만적인 행로가 등산의 부록처럼 따라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리망산은 육지의 내로라하는 다른 산들이 황량한 풍경을 갖게 되는 겨울철이 특히 매혹적이다. 한겨울에도 남쪽 바다의 섬이라 바람에 훈기가 느껴지는 데다 활엽수들이 잎을 떨구고 난 뒤, 눈이 시도록 푸른 바다와 말갈기 같은 암봉을 오히려 더 근사하게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리망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다. 칼날 같은 바위능선을 네 발로 기어가야 하는 구간이 적지 않다.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하는 코스도 있고, 바위 직벽을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구간도 있다. 위험 구간을 우회하는 코스가 올 들어 새로 놓여서 길이 좀 순해지긴 했다지만, 아무래도 더 빼어난 절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는 이른바 ‘위험 구간’에 들어섰을 때다. 위험 구간에 올라서 능선의 칼바위를 붙잡고 발끝으로 온몸의 균형을 유지하다 보면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남쪽의 땅끝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사량도까지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지리망산을 찾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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