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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폭설로 내려 쌓인 눈이 소리를 빨아들여서 그랬을 것이었다. 강원 평창의 오대산 아래 월정사로 드는 전나무 숲길에는 적막이 가득 고여 출렁거렸다. 이런 순백의 고요한 공간 속을 스님 셋이 눈 딛는 발자국 소리만 남기며 묵언으로 지나고 있었다. |
대설주의보의 분분한 눈발 속에서 오대산으로 들어갑니다. 신새벽 산중의 눈 쌓인 오솔길은 아무도 딛지 않은 순백으로 빛났지만, 오래전에 이 길을 먼저 건너간 이들이 있었습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율사, 신라 신문왕의 아들 법천, 스물일곱 해 동안 산문 밖에 한 발짝도 나서지 않았다는 한암선사….
그들의 걸음을, 아니 차고 맑은 그들의 정신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월정사에서 시작해 상원사, 중대 사자암, 적멸보궁을 거쳐 오대산 비로봉까지 닿는 길. 그 길에서 화려한 눈꽃보다 더 아름다웠던 건 세속의 것들을 훌훌 버리고 떠나온 이의 걸음걸이, 혹은 평생 수도의 자세를 잃지 않은 이의 용맹정진이었습니다. 눈은 오래 그치지 않았고, 눈에 파묻힌 암자 마당에는 눈보다 더 맑은 정신이 가득 고여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 강원도 산간에 대설주의보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건 지난밤부터였다. 세상의 모든 경계란 경계는 다 지워진 이른 아침.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으로 오대산 일대는 온통 ‘눈세상’이었다. 잠시 멈췄다가 다시 쏟아지곤 하는 눈발 속에서 월정사로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에 들었다.
눈밭 속에서 전나무 둥치는 굵은 붓으로 힘차게 찍어낸 먹빛이었고, 실핏줄 같은 가지마다 설화(雪花)가 만발했다. 눈의 무게로 휘어진 가지에서는 이따끔 풀썩 눈이 쏟아져서 바람에 흩어졌다. 순백으로 포위된 침묵의 숲. 아는 이들은 안다. 눈 내린 직후의 숲이 얼마나 고요한지, 눈이 얼마나 깊은 진공의 침묵을 만들어내는지를….
그 적막의 숲길 저쪽 끝에서 스님 셋이 숲길로 걸어들어왔다. 아마도 깊은 산사에서 수도의 긴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도반(道伴)들이리라. 뽀드득…. 순백으로 적막한 세상에 묵언의 스님들이 딛고 가는 눈밟는 소리. 마음을 수시로 어지럽히곤 했던 색깔들이 다 지워진 무채색의 길. 스님 셋이 나란히 낸 첫 발자국을 먼 발치서 따라가다가 왜 갑자기 그 문장이 떠올랐을까. ‘눈 쌓인 길 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자취가 뒤에 올 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서산 대사의 ‘답설(踏雪)’)
다른 계절도 마찬가지지만, 겨울 오대산의 백미라면 단연 월정사까지 1㎞ 남짓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이다. 오며 가며 40분쯤, 아니 속도를 늦추자면 왕복 1시간쯤 걸리는 길. 눈발을 뒤집어쓴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우람하게 서 있는 그 길이야말로 겨울 오대산을 찾는 보람이다.
본디 이 숲길의 시작은 ‘아홉 그루의 나무’였다고 했다. 이름하여 ‘아홉 수(樹)’라고 부른다던가. 수령 500년을 넘긴 아홉 그루의 전나무 고목. 고목들이 수백 년 동안 뿌린 씨들이 이렇듯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전나무 숲을 만들어냈단다. 500년의 시간을 건너온 아름드리 전나무 사이로 스님들이 이른 아침 눈밭에 찍어놓은 발자국 앞에서 ‘모든 것의 처음’의 모습을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새해를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강원산간의 대설주의보는 여전히 발효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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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절집 아래 사하촌에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폭설이 쏟아지고 있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날이었다. |
# 월정사, 불법의 경계를 이룬 절집
월정사는 스스로 ‘경계’를 이룬다. 오대산을 중심에 두고 봐도 그렇고, 불법(佛法)의 의미에서 본대도 그렇다.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숲으로 드는 관문이기도 하고, 저자의 세속과 산중의 피안을 가르는 문의 역할도 한다. 하지만 오대산 본래의 정신과 깊이는 경계에서는 알 수 없는 법. 전나무 숲길의 정취와 월정사가 품은 고즈넉함을 폄훼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월정사에서 더 깊은 상원사로, 중대 사자암으로, 적멸보궁으로, 거기서 오대산 비로봉까지 올라봐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만나게 된다.
산 이름 ‘오대(五臺)’부터 풀어보자. 오대산은 비로봉,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의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 그 산자락마다 방위에 따라 동대, 서대, 남대, 북대의 암자를 놓고 복판에 중대를 들였으니 산중에 다섯 개(五) 대(臺)가 놓인 셈이다. 오대란 이름은 이렇게 얻어졌다.
그렇다면 그 중심은 당연히 산의 가운데 딱 버티고 선 중대의 ‘사자암’을 말함일 텐데, 사자암은 기실 그 위쪽에 세워진 세 칸짜리 전각 ‘적멸보궁’을 건사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니 오대의 중심이자 주인은 ‘적멸보궁’인 셈이다.
‘적멸보궁’이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 그렇다면 누가 이 깊은 산중에 부처의 사리를 가져다가 두었을까. 신라 때의 고승 자장은 수도를 마치고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를 이곳 오대산을 비롯해 양산 통도사, 설악 봉정암,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에 모셨다. 이른바 ‘5대 적멸보궁’이다. 이 네 곳의 적멸보궁 중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사리와 부처의 머리뼈를 함께 모셨다는 이곳 오대산의 보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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