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발리의 우붓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뜨갈랄랑에서 만난 계단식 논. 발리의 계단식 논은 고된 노동의 흔적이지만, 경사면을 따라 논이 만들어낸 구불구불한 곡선은 마치 잘 가꿔진 정원과도 같은 조형미를 선사한다. 발리에서 마주치는 계단식 논은 조경의 여유가 아닌, 노동과 생계가 만들어낸 것이어서 더 감동적이다. |
인도네시아의 발리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곳을 ‘야자나무 드리운 그늘 아래서 듣는 파도소리’로 간추려지는 남국의 낭만적인 휴양지쯤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사실 발리의 바다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남국의 휴양지에서 기대했던 ‘에메랄드빛 바다’의 환상은 발리에서 여지없이 깨집니다.
바다만 놓고 본다면 발리를 왜 ‘세계적인 휴양지’로 꼽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실제로 발리를 다녀온 이들 중 상당수가 이런 실망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발리의 탓이 아니라 순전히 여행자의 오해 탓입니다.
여행지로서 발리의 매력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필리핀의 보라카이는 화이트샌드(흰 모래)로 대표되고, 태국의 푸껫이 에메랄드빛 바다로 간명하게 정리되는 데 반해, 발리는 그 매력을 한두 가지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발리가 세계적인 여행지, 그것도 ‘격이 다른’ 여행지로 꼽히는 건, 무엇보다 바로 이런 다양성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발리가 가진 건 이런 것들입니다. 예술적 영감으로 가득한 소도시, 풀벌레 소리 고즈넉한 호수, 가파른 협곡의 조형적인 계단식 논…. 발리라면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하는 붉게 타오르는 낙조의 바다와 풀빌라를 갖춘 고급리조트, 서퍼들로 붐비는 하드락의 해변 등은 어쩌면 가장 ‘발리답지 않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 번의 발리 방문에서 깨달은 것이, 여행자들이 발리에서 봐야 할 것은 바다가 아니라 ‘신(神)’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섬 전역에 2만여 개가 넘는다는 힌두사원이나 하루에도 몇 번씩 꽃잎을 제물로 바치며 기도하는 발리 사람들에 대한 단편적이고 이국적인 호기심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발리에서 진짜 신은 그곳 사람들이 품고 있는 신에 대한 경배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살펴야 비로소 보입니다. 예술적 영감으로 가득한 발리의 도시 우붓에서 신은 빛나는 예술작품으로 탄생하고, 중부 산악지대 뜨갈갈랑의 비탈진 다랑논에서는 고되지만 신성한 노동으로 드러납니다. 기념품 상점의 진열장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 아무렇게나 놓인 자그마한 소품 하나에서 마주하는 창의적이고 빛나는 예술적 성취, 그리고 가파른 계단식 논을 기어올라가 물꼬를 돌보는 얼굴 그을린 농부들의 잇몸이 드러난 환한 미소는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런 감동이야말로 다른 여행지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발리가 여행자들에게 건네주는 가장 큰 선물인 듯했습니다. 헤아리자면 끝이 없는 발리의 매력. 그중에서 이렇듯 감동적이었거나 인상깊었던 발리의 풍경을 네 장의 그림으로 여기 펼쳐 보여 드리겠습니다.
![]() |
온통 구름으로 둘러싸인 고산지대의 호수를 끼고 있는 울룬다누 사원. 발리 전역에는 2만 개가 넘는 사원이 있지만, 그중에서 종교적인 측면이나 아름다움에서나 첫손으로 꼽히는 게 여기 울룬다누 사원이다. 인도네시아 5만 루피아 화폐의 뒷면에 이 사원이 그려져 있다. |
![]() |
![]() |
![]() |
발리의 첫 번째 풍경이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다. 발리에서는 계단식 논을 이렇게 불렀다. 발리에는 주도 덴파사르나 해안 관광지를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계단식 논을 볼 수 있다. 제주도의 3배 크기라고는 하지만 발리 섬 한가운데 3000m가 넘는 산악지대가 있으니 대부분의 땅이 비탈이기 때문이다. 계단식 논들은 거기 사는 농부들에게는 고된 농사일을 증거하지만, 논이 그려내는 곡선은 그 자체로 빼어난 미감(美感)을 드러낸다. 일상이 저 스스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풍경. 이게 바로 발리의 아름다움을 관통하는 비밀이자, 그 아름다움을 해독하는 열쇠다.
다랑논 앞에서 관광객들은 저마다 카메라를 꺼낸다. 계단식 논에 대한 열광은 농경문화에 익숙한 아시아 사람들보다, 서양인 관광객들이 훨씬 더했다. 그들은 테라스(Terrace)란 이름 그대로 계단식 논을 ‘아름다운 정원’쯤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내륙의 이름난 카페들은 죄다 이런 경관을 바라다볼 수 있는 자리에다 테이블을 펼쳐 놓았다. 얼마나 빼어난 다랑논의 조망을 갖고 있는지가 리조트의 수준을 좌우했다.
어떤 이에게는 고된 노동의 장면이 다른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휴식 풍경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화려한 차림의 관광객들이 뙤약볕에 그을린 농부들을 일으켜 세워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을 말이다. 그런 장면이 좀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우리가 발리 사람들과 비슷한 방식의 노동을 경험해 봐서일 터다. 그러나 발리 사람들은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관광객들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들에게는 노동이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생계 유지 차원을 넘어 신에게 바치는 노고인 셈이었다.
계단식 논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꼽히는 곳이 우붓 북쪽의 작은 마을 뜨갈랄랑에 있다. 논의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카페가 들어서면서 관광지처럼 꾸며지고 있긴 했지만, 급경사 협곡의 다랑논이 그려내는 유려한 곡선은 가히 최고였다. 그 논의 꼭대기에 짚풀로 단장한 자그마한 사원이 있었다. 웃옷을 벗은 농부들은 기다시피 논을 오르내리며 농사일을 하다가 신께 꽃잎을 바치고 경배를 올렸다. 햇살이 길게 비끼는 오후 그 모습을 보면서 계단식 논이 성실하고 숭고한 삶이 빚어낸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