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12, 2014

동서양이 현해탄 섬들의 군무에 어우러지다-나가사키현 히라도 코스

미야자키현 다카치호 코스에서 만나는 최고 절경인 다카치호 협곡의 미나이 폭포 아래로 유람객들이 보트의 노를 저으며 유유자적하고 있다.


직립보행이 생존을 위한 인류의 숙명이었다 해도 축복이다. 생계를 위한 걷기는 숭고하지만 처연하다. 이에 대한 반발로 ‘살아남기 위한 걷기’를 뛰어넘어 ‘자유로워지기 위한 걷기’ 문화가 생겨났던 건 아닐까. 산책이나 산보 같은 번역어투의 모호함이 아닌 진짜 ‘걷기’는 정면보다는 나를 둘러싼 주변을 살펴보게 해주고, 내 주장보다 타인의 생각을 곱씹게 해준다. 걷기에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것은 바로 ‘길’이다. 본래부터 있던 길은 없다. 길은 사람의 수많은 발자취가 쌓여 만들어진 것. 인간이 만든 모든 길은 오솔길, 산길, 흙길, 돌길, 신작로, 아스팔트길을 차례로 지나며 문명과 자연을 아우른다. 이러한 길들이 이어지며 역사가 만들어졌다. 

1000년이 넘는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 북부를 잇는 750여 ㎞에 이르는 ‘성 야고보의 길’이 그 대표적인 예다. 흔히 ‘순례자의 길’이라 일컬어지는 이 길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서명숙 제주올레재단 이사장이 자신의 고향 제주에 올레길을 놓는 계기가 됐다. 서 이사장은 성 야고보의 길을 걷는 내내 고향 땅 제주를 떠올렸다고 했다. 이런 사연으로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과 마을 사이에 놓인 올레길은 지난해 무려 100만 명의 도보여행자들을 불러들였다.

‘올레길’의 유례없는 성공 신화는 급기야 일본 규슈(九州)에 수출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규슈에서 도보코스 조성을 위해 연 100만 엔(1200여만 원)에 ‘올레’의 브랜드를 수입해 간 것이다. 이렇게 제주에서 이름을 빌려간 규슈 올레는 지난해 2월 4개 코스가 조성된 데 이어 1년 만인 지난 16일 또다시 4개 코스가 새로 놓였다. 올레길이 제주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일본 규슈에 새로 놓인 4개의 올레 코스를 나흘에 걸쳐 느린 걸음으로 돌아봤다.

나가사키현 히라도 코스에 절과 교회가 사이좋게 보이는 돌담길.


◆동서양이 현해탄 섬들의 군무에 어우러지다-나가사키현 히라도 코스

규슈(九州)는 일본을 구성하는 4개의 큰 섬 중 한국과 제일 가까운 곳으로 남한 면적의 절반 크기다. 2012년 규슈를 방문한 외국관광객 100만 명 중 한국인이 65만 명이고 그중 10%는 10회 이상 다시 찾았다고 한다. 선박과 항공 등 접근이 편하고 온천이 좋고 음식이나 숙박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이다. 

나가사키현 히라도 코스에서 만난 친절한 일본인의 한글 문구가 귀엽다.
하지만 이번에 1120㎞를 이동하며 규슈 제2차 올레길 네 군데를 걸으며 숨겨진 일본의 속살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역시 시골은 어디나 몸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규슈 북부의 서쪽 끝에 자리한 히라도(平戶)는 인구 3만5000명의 옛 영화를 간직한 항구도시다. 항구 앞 현해탄을 통해 당·송나라 등 중국, 한국 등과 교역이 이뤄졌고 1500년대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서양과의 해외무역항이었으면 아픈 일본 기독교 역사의 흔적이 산재한다. 이러한 히라도의 특징을 담아 올레길은 이어졌다.

항구 어디에서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1710년 개축한 히라도성을 바라보며 들어선 골목에는 1500년대 개업한 가게 등 목조 건물들의 생생한 전시장이 이어졌다. 일본 내에서도 근래에 보기 드물어 재조명되는 중이란다. 상가를 빠져나와 809년 창건했다는 사이코지절에 들어서니 그 역사만큼 세월의 두께가 산문을 따라 늘어선 지장보살에 새겨져 있다.

눅눅한 숲길을 벗어나자 외딴집 밖에 “아무쪼 록드셔 주십시오”라는 서툰 한글 아래 사탕 등의 간식거리가 놓여 있었다. 낯모르는 집주인의 배려가 친근했다. 민둥산 같은 해발 200m의 가와치토오게 초원은 정상에서 360도 파노라마 같이 히라도 내해를 볼 수 있다는데 이날은 오락가락한 짙은 안개가 드러내고 숨기를 반복하던 섬들의 군무를 더 아름답게 했다. 희미했던 섬들과의 거리는 바로 아래 마련된 야외 캠핑장에 내려서자 훨씬 가까워졌다. 말 그대로 가슴을 뚫고 섬들이 흔들흔들 춤을 춘다.

한국의 어지간한 야구장보다 시설이 뛰어날 것 같은 아카사카 야구장을 지나자 히라도 기독건축물을 대표하는 민트색 찬란한 자비엘기념교회가 반갑게 맞는다. 기독교 인구가 전국민의 1%도 안 되고 보통 성당의 교인이 수십 명에 불과할 정도로 미약한 교세지만 교회게시판에 붙은 불우이웃돕기 행사가 신앙의 깊이를 가늠케 했다. 에도(江戶) 막부시대 금교령으로 히라도에 숨어 있다 화형 당한 순교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들어선 돌담길은 천주교당의 뾰족탑과 쇼주지절을 고즈넉하게 품어 안아준다. 흰 매화가 수줍게 고개를 내민 사찰 경내를 지나면 자연히 히라도항과 마을들이 사정없이 두 눈을 호사하게 한다.

수령 400년의 큰 소철나무가 있는 주택가를 지나 소박한 기념품 상점가를 지나면 포경항으로 유명했던 곳답게 고래고기 전문점을 만날 수 있다. 고로케와 햄버거에서 특유의 풍미가 느껴진다. 특산품인 아고라고 불리는 말린 날치를 둘러보던 제주에서 온 중년의 올레꾼은 제주와는 다른 의미에서 만족스러운 올레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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