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12, 2014

향기를 따라 선암사의 경내에 들어서다

조계산을 넘어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고갯길 굴목재. 초겨울의 청량한 그 숲길에도, 계곡의 맑은 물에도 낙엽이 떨어져 쌓여가고 있다. 발밑에서 사각거리는 낙엽을 디디며 이쪽 절집에서 저쪽 절집으로 넘어가는 길에 잠깐 걸음을 멈추고 물 위에 고요하게 떠 있는 낙엽들을 바라봤다.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의 선암사와 송광사. 어디가 더 낫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한 위세에다 그윽한 정취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맑은 절집. 다시 설명하기 새삼스러울 정도로 익히 알려진 곳이지요.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혹은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절집을 넘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조계산을 넘어 두 절집을 잇는 실낱같은 고갯길 ‘굴목재’입니다. 고갯길의 거리는 6.5㎞. 두 절집으로 드는 들머리까지 다 합친다면 8.4㎞ 남짓입니다.

단풍 따라 밀려왔던 행락객들의 어지러운 발걸음이 낙엽으로 지워지고 있는 절집은 고즈넉했습니다. 절집의 들머리에서 잘 마른 장작을 때는 내음이 코끝을 스쳤습니다. 절집에 딸린 작은 찻집에서 일찍 오는 손님들을 위해 대추차를 달이는 모양이었습니다. 이른 새벽, 순백의 차꽃이 피어난 절집을 지나고, 가지런히 도열한 편백나무도 지나서 흰 입김을 뿜으며 걸어 들어가는 숲길. 마지막 단풍을 아슬아슬 매달고서 시리게 선 나무들에게서는 알싸한 박하향이 풍겼습니다. 모든 숲이 바야흐로 ‘다 내려놓는 시간’을 맞아 고요로 출렁이는 시간. 이 길이야말로 그런 시간의 즈음에 딱 맞는 길입니다. 

두 절집을 잇는 산길에서 줄곧 따라오는 건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 위의 발자국 소리뿐. 가는 물소리와 나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 간혹 새소리가 발자국 소리 위에 겹쳐지기도 했습니다. 배낭 따위는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빈손으로 걷는 게 더 나은 길. 이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혹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맑은 기운이 몸 안에 가득 차 넘칩니다. 길 이쪽저쪽에서 마치 길을 묶어놓은 매듭처럼 자리 잡고 있는 두 곳 절집의 고요한 초겨울의 정취 또한 빼놓을 수 없지요.

이맘때 순천으로의 여정을 권하는 이유가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낙안읍성에서는 처마를 잇대고 있는 초가집 마당의 붉은 감나무와 볏짚을 태우는 연기가 낮게 깔린 풍경을 만날 수 있고, 순천만에서는 소설 ‘무진기행’의 한 대목처럼 밤새 진주해 온 안개로 가득한 갈대밭을 걸을 수 있습니다. 여기다가 좀 더 부지런하다면 상사호와 주암호 드라이브와 모후산 깊은 자락의 오지마을에 숨어 있는 정자 초간정의 아름다움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우화등선(羽化登仙).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된다는 뜻이다. 그 줄임말인 ‘우화(羽化)’란 이름이 송광사 산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건너는 다리에 붙여져 있다. 우화교의 아치형 교각 사이로 송광사를 찾은 관광객들이 징검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바라봤다.



# 향기를 따라 선암사의 경내에 들어서다

늦은 가을에 등황색 꽃이 피는 금목서란 나무를 아시는지. 그 꽃의 매혹적인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는지. 아는 이들만 아는 얘기. 가을날 선암사는 단풍빛 곱기로 알아주지만, 금목서의 꽃향기 덕에 눈보다는 코가 호사를 한다. 산문 아래 작은 연못 ‘삼인당’ 주변에 불붙듯 타오르는 단풍도 좋지만, 그보다 절집 경내와 주변의 금목서와 은목서에 꽃이 피어날 때 온통 절집을 가득 채우는 향기가 으뜸이란 얘기다. 나른한 봄날 선암사 무우전 담벼락에 뿌리를 내린 600년 묵은 고매화 선암매(仙巖梅)가 피워내는 향기가 그윽하고 은은하다면, 가을의 끝자락에 금목서가 뿜어내는 향기는 한층 더 강렬하고 아찔하다.

조계산 자락의 어깨를 타고 넘어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고갯길 ‘굴목재’로 들어서는 길. 두 절집을 잇는 길이니 선암사에서도, 송광사에서도 시작할 수 있지만, 구태여 선암사 쪽을 들머리로 잡은 것은 바로 ‘향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좀 늦었다. 잦은 찬비로 금목서 꽃은 이미 져가고 있고, 향기도 희미할 뿐이니…. 그렇대도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선암사 뒤편의 야생차밭에는 지금 순백의 차꽃이 한창이니 말이다. ‘차나무에도 꽃이 피냐’는 질문은 몰라서 하는 얘기다. 차나무는 초겨울 서리 속에서 제법 화려한 흰 꽃을 피운다. 노란 수술을 두른 꽃잎이 어찌나 정갈하게 희던지 그 꽃을 ‘소화(素花)’라 부른다. 이즈음 차밭에 가면 서리 속에 꽃이 구름처럼 핀다 해서 ‘운상화(雲霜花)’라고도 불린다. 선암사의 차밭에는 지금 오백 원짜리 동전만 한 꽃들이 초록의 차이파리 사이에 고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비록 짙지는 않지만 코를 가까이 대면 은은하게 느껴질 듯 말 듯 향내가 스친다.

초겨울의 선암사에 어찌 꽃향기만 있을까. 오랫동안 고쳐 짓지 않은 선암사의 묵은 절집 아궁이에 나무를 때는 냄새도 그윽하다. 선암사 초입의 자그마한 찻집에서 대추차를 달이는 향기는 또 어떤가. 여기다가 굴목재로 들어서는 선암사 쪽 초입에 힘차게 뻗은 편백나무 숲이 뿜어내는 알싸한 피톤치드의 박하향도 빼놓을 수 없다. 선암사로 드는 길에서 만나는 아치형 승선교의 아름다움과 문화재로 지정된 뒷간, 무우전의 돌확 등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송광사 쪽 굴목재 숲길. 절정의 순간은 지났지만 단풍이 늦는 이쪽에는 붉고 노란 잎들이 아직 화려하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