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12, 2014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에버랜드 신개념 사파리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 ‘로스트밸리’ 사파리 코스 안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인 ‘평화의 언덕’이 그 해답을 보여준다. 평화의 언덕에는 육식동물인 치타와 초식동물 코뿔소가 함께 생활한다. 스웨덴의 한 동물원에서의 성공적인 사례를 적용한 것이지만, 때때로 치타와 코뿔소가 무리를 지어 대치하는 바람에 사육사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지금껏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사파리’가 새로 선보입니다. 펜스도 철망도, 장벽도 없이 바위 협곡과 수로 호수와 폭포에서 동물들이 뛰노는 곳. 이곳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것을 탐하는 맹수들의 포효가 아니라 조화와 평화, 그리고 공존을 보여주는 동물들의 세상입니다. ‘로스트밸리’. 이름하여 ‘잃어버린 계곡’입니다.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이나 평원이 고향인 20종류의 150마리 동물을 들여놓은 ‘인위의 공간’이긴 하지만, 이곳의 동물들은 생태적인 습성을 배려해 자연스럽게 조성한 사파리 구역 안에서 저마다 제 본능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맹수사파리에서 만나는 간담 서늘한 위협의 이빨이나 발톱 같은 짜릿함은 없습니다. 대신 동물과 동물이, 혹은 인간과 동물들이 서로 방해받지 않은 채 영역을 넘나들며 무심한 듯, 혹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지켜봅니다.

이렇게 서로 어울려 사는 동물들의 모습이 특별한 건, 동물을 유리벽이나 철창 너머 ‘구경거리’의 대상으로 대우하지 않고, 공존이란 소중한 가치를 드러내려 한 의도가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사파리의 곳곳에서 코뿔소와 치타가, 기린과 세이블앤틸롭이, 바바리양과 흰오릭스가 함께 살아가고, 이런 동물들 사이로 이따금씩 유리 없는 창을 가진 수륙양용차가 지나갑니다. 호기심 많은 기린은 차 안으로 자주 머리를 들이밀어 기웃거리고, 바위를 타고 앉은 산양은 겅중겅중 바위를 뛰다가 멈춰 서서 관람객들과 눈을 맞춥니다.

어쩌면 이런 공간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꿈의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가 동화 같을 리 없을 것이고, 동물을 가둬 놓은 인간의 이기를 합리화하는 것도 좀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래도 좋습니다. 언젠가 인적 드문 깊은 숲길을 걷다가 고라니 한 마리와 딱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가슴 떨림, 혹은 감동. 로스트밸리에서는 그 비슷한 것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작은 사진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바바리양, 관학, 얼룩말, 세이블앤틸롭. 가운데는 일런드. 아래 큰 사진은 세계적으로 단 300마리만 있다는 백사자의 당당한 위용. 국내에서는 에버랜드가 유일하게 크림색 백사자 6마리를 보유하고 있다.

# 치타와 백사자가 동물원에서 사라진 까닭

지난해 10월쯤의 일이었다. 에버랜드 주토피아(동물원)에서 치타 두 마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팽팽한 긴장으로 몸을 잔뜩 낮춘 채 우리 안을 불안하게 오가던 놈이었다. 그 뒤로 6개월 동안 에버랜드에서 치타를 본 관람객은 없었다. 

사라진 건 치타만이 아니었다. 이보다 한참 앞서 전 세계에 300마리밖에 없다는 백사자 3마리도 몸을 감췄다. 명물 중의 명물이었던 흰 갈기의 백사자를 동물원 안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뒤이어 거대한 몸집의 코끼리도, 쿵쿵 땅을 구르던 코뿔소도 차례로 사라졌다. 급기야 무리를 이뤄 겅중겅중 뛰며 관람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열두 마리의 기린까지 한꺼번에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필시 동물원 어디에선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일인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이제 그 비밀이 공개됐다. 에버랜드의 ‘로스트밸리’ 프로젝트. 로스트밸리는 에버랜드가 무려 500억 원을 투입해 2년여간의 준비작업을 거쳐 오는 20일 운영을 시작하는 신개념의 사파리다.

기존의 ‘사파리월드’가 맹수 중심의 사파리라면, 그 옆에 들어서는 로스트밸리는 초식동물을 중심으로 맹수를 함께 보여주는 사파리다. 에버랜드는 여기에 개장 이래 최고의 거액을 투자했다. 에버랜드가 로스트밸리에 전력을 추구한 것은 세계적인 테마파크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국내 진출 움직임에 맞서 야심 차게 준비한 회심의 빅 카드였기 때문이다.

동물원에서 사라진 맹수와 초식동물은 지난 2년여 동안 조성한 4만1000㎡(1만2400여 평)의 로스트밸리 공간으로 비밀리에 옮겨져 새로운 거처에 적응하고 있었다. 애초에 사라진 것보다 동물의 숫자도 불어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싱가포르에서 새로 데려온 놈들이었다. 

치타는 두 마리가 더 들어와 도합 네 마리로 늘었고, 백사자는 세 마리를 더해 여섯 마리가 됐다. 코뿔소도 두 마리에서 네 마리로 늘었다. 코끼리도 스리랑카에서 두 마리가 더 들어왔다.이뿐만 아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산양을 비롯해 굵은 뿔을 가진 무플론, 목 아래로 멋진 갈기를 가진 바바리양, 날카로운 뿔을 가진 세이블앤틸롭 등도 사파리의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에버랜드는 사파리와 인연이 깊다. 에버랜드의 전신은 ‘자연농원’. 지금으로부터 꼭 37년 전인 1976년 4월 18일 개장한 자연농원의 최고 명물은 단연 ‘라이언 사파리’였다. 지금처럼 버스를 타고 사자를 보는 사파리였다. 한데 너나없이 궁핍했던 시절에 사자를 외국에서 귀한 달러로 사 볼거리로 들여온다는 게 눈총을 받을 일이었던 모양. 자연농원 개장 직후 창경원보다 비싼 입장료에 대해 비판 여론이 일자 급기야 박준규 당시 공화당 정책위의장이 나서서 한마디했다. “도대체 사자를 왜 들여왔는지 모르겠다….” 지금 되돌아보면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다.

# 가로막는 ‘유리’가 없다는 것의 감동

‘로스트밸리’의 가장 큰 특징은 ‘수륙양용차’를 타고 물과 땅을 오가며 동물을 본다는 점. ‘말하는 코끼리’ 코식이의 뒤쪽으로 수륙양용차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로로 진입하고 있다.
로스트밸리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수륙양용차량을 타고 사파리를 즐긴다는 점이다. 수륙양용차를 이용한 사파리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길이 10.7m에 높이 3.85m의 수륙양용차는 당당한 근육질의 위용부터가 아이들에게 탐험의 흥분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4륜 구동 동력장치에 수중 프로펠러를 갖춘 수륙양용차는 영국으로부터 들여온 것. 양산 차량이 아니라 한 대 한 대 주문을 받아 수작업으로 제작된 명품이다. 

로스트밸리에 구태여 수륙양용차를 들인 것은 바위와 물길, 초지 등으로 다양하게 설계된 사파리 공간을 넉넉하게 주파할 수 있다는 강점도 있지만, 그보다 사파리 관람의 즐거움에 ‘탈것’의 재미를 보태주기 위한 것. 실제로 바퀴로 땅을 달리다가 일순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로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은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하다.

낯선 탈것인 수륙양용차는 여러 가지 매력이 있지만 그중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라면 ‘창(窓)’이다.

차량의 관람창에는 유리가 없다. 관람자와 동물 사이에 아무런 차단 장치가 없다는 건 그야말로 ‘감동’이다. 그게 뭐 대수냐 싶겠지만, 차량에 탑승해 보면 그 매력을 대번에 알게 된다. 게다가 이 차량이 지나는 로스트밸리의 사파리 공간에는 철책이나 우악스러운 우리도 없다. 오래돼 넘어진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거목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해 우리로 삼았고, 맹수들의 공간에서 꼭 필요한 부분에는 작은 관목 형태의 전기선을 꽂아 두었을 뿐이다.

차창에 유리가 없다는 것과 사파리 공간에 우리가 없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유리벽 너머의 우리 속 동물은 그저 ‘볼거리의 대상’으로 다가올 뿐이지만, 아무런 차단 없이 마주하는 동물은 감정이입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면 우리 속에 가둬져 불안하게 서성이는 고라니를 관람하는 것과 호젓한 숲속 오솔길에서 고라니와 딱 맞닥뜨렸을 때의 감동의 차이와 비슷하다. 

열린 공간에서 사이를 가로막는 아무런 장치도 없이 동물들과 눈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게 실상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위해 치밀하게 의도된 공간일지라도 말이다.

유리와 우리가 없는 동물과의 조우는 곧 로스트밸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드러낸다. 동물과 인간이 교감하는 생태형 사파리. 이것이야말로 독일 하노버동물원을 설계했던 독일 단펄만사가 에버랜드의 주문을 받아 그려낸 로스트밸리의 모습이다.

향기를 따라 선암사의 경내에 들어서다

조계산을 넘어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고갯길 굴목재. 초겨울의 청량한 그 숲길에도, 계곡의 맑은 물에도 낙엽이 떨어져 쌓여가고 있다. 발밑에서 사각거리는 낙엽을 디디며 이쪽 절집에서 저쪽 절집으로 넘어가는 길에 잠깐 걸음을 멈추고 물 위에 고요하게 떠 있는 낙엽들을 바라봤다.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의 선암사와 송광사. 어디가 더 낫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한 위세에다 그윽한 정취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맑은 절집. 다시 설명하기 새삼스러울 정도로 익히 알려진 곳이지요.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혹은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절집을 넘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조계산을 넘어 두 절집을 잇는 실낱같은 고갯길 ‘굴목재’입니다. 고갯길의 거리는 6.5㎞. 두 절집으로 드는 들머리까지 다 합친다면 8.4㎞ 남짓입니다.

단풍 따라 밀려왔던 행락객들의 어지러운 발걸음이 낙엽으로 지워지고 있는 절집은 고즈넉했습니다. 절집의 들머리에서 잘 마른 장작을 때는 내음이 코끝을 스쳤습니다. 절집에 딸린 작은 찻집에서 일찍 오는 손님들을 위해 대추차를 달이는 모양이었습니다. 이른 새벽, 순백의 차꽃이 피어난 절집을 지나고, 가지런히 도열한 편백나무도 지나서 흰 입김을 뿜으며 걸어 들어가는 숲길. 마지막 단풍을 아슬아슬 매달고서 시리게 선 나무들에게서는 알싸한 박하향이 풍겼습니다. 모든 숲이 바야흐로 ‘다 내려놓는 시간’을 맞아 고요로 출렁이는 시간. 이 길이야말로 그런 시간의 즈음에 딱 맞는 길입니다. 

두 절집을 잇는 산길에서 줄곧 따라오는 건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 위의 발자국 소리뿐. 가는 물소리와 나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 간혹 새소리가 발자국 소리 위에 겹쳐지기도 했습니다. 배낭 따위는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빈손으로 걷는 게 더 나은 길. 이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혹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맑은 기운이 몸 안에 가득 차 넘칩니다. 길 이쪽저쪽에서 마치 길을 묶어놓은 매듭처럼 자리 잡고 있는 두 곳 절집의 고요한 초겨울의 정취 또한 빼놓을 수 없지요.

이맘때 순천으로의 여정을 권하는 이유가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낙안읍성에서는 처마를 잇대고 있는 초가집 마당의 붉은 감나무와 볏짚을 태우는 연기가 낮게 깔린 풍경을 만날 수 있고, 순천만에서는 소설 ‘무진기행’의 한 대목처럼 밤새 진주해 온 안개로 가득한 갈대밭을 걸을 수 있습니다. 여기다가 좀 더 부지런하다면 상사호와 주암호 드라이브와 모후산 깊은 자락의 오지마을에 숨어 있는 정자 초간정의 아름다움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우화등선(羽化登仙).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된다는 뜻이다. 그 줄임말인 ‘우화(羽化)’란 이름이 송광사 산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건너는 다리에 붙여져 있다. 우화교의 아치형 교각 사이로 송광사를 찾은 관광객들이 징검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바라봤다.



# 향기를 따라 선암사의 경내에 들어서다

늦은 가을에 등황색 꽃이 피는 금목서란 나무를 아시는지. 그 꽃의 매혹적인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는지. 아는 이들만 아는 얘기. 가을날 선암사는 단풍빛 곱기로 알아주지만, 금목서의 꽃향기 덕에 눈보다는 코가 호사를 한다. 산문 아래 작은 연못 ‘삼인당’ 주변에 불붙듯 타오르는 단풍도 좋지만, 그보다 절집 경내와 주변의 금목서와 은목서에 꽃이 피어날 때 온통 절집을 가득 채우는 향기가 으뜸이란 얘기다. 나른한 봄날 선암사 무우전 담벼락에 뿌리를 내린 600년 묵은 고매화 선암매(仙巖梅)가 피워내는 향기가 그윽하고 은은하다면, 가을의 끝자락에 금목서가 뿜어내는 향기는 한층 더 강렬하고 아찔하다.

조계산 자락의 어깨를 타고 넘어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고갯길 ‘굴목재’로 들어서는 길. 두 절집을 잇는 길이니 선암사에서도, 송광사에서도 시작할 수 있지만, 구태여 선암사 쪽을 들머리로 잡은 것은 바로 ‘향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좀 늦었다. 잦은 찬비로 금목서 꽃은 이미 져가고 있고, 향기도 희미할 뿐이니…. 그렇대도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선암사 뒤편의 야생차밭에는 지금 순백의 차꽃이 한창이니 말이다. ‘차나무에도 꽃이 피냐’는 질문은 몰라서 하는 얘기다. 차나무는 초겨울 서리 속에서 제법 화려한 흰 꽃을 피운다. 노란 수술을 두른 꽃잎이 어찌나 정갈하게 희던지 그 꽃을 ‘소화(素花)’라 부른다. 이즈음 차밭에 가면 서리 속에 꽃이 구름처럼 핀다 해서 ‘운상화(雲霜花)’라고도 불린다. 선암사의 차밭에는 지금 오백 원짜리 동전만 한 꽃들이 초록의 차이파리 사이에 고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비록 짙지는 않지만 코를 가까이 대면 은은하게 느껴질 듯 말 듯 향내가 스친다.

초겨울의 선암사에 어찌 꽃향기만 있을까. 오랫동안 고쳐 짓지 않은 선암사의 묵은 절집 아궁이에 나무를 때는 냄새도 그윽하다. 선암사 초입의 자그마한 찻집에서 대추차를 달이는 향기는 또 어떤가. 여기다가 굴목재로 들어서는 선암사 쪽 초입에 힘차게 뻗은 편백나무 숲이 뿜어내는 알싸한 피톤치드의 박하향도 빼놓을 수 없다. 선암사로 드는 길에서 만나는 아치형 승선교의 아름다움과 문화재로 지정된 뒷간, 무우전의 돌확 등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송광사 쪽 굴목재 숲길. 절정의 순간은 지났지만 단풍이 늦는 이쪽에는 붉고 노란 잎들이 아직 화려하다.

‘미지의 땅’ 中 인촨 여행


옛 아라비아 상인들이 교역품을 싣고 오가던 실크로드를, 그때나 지금이나 이동수단인 낙타 등에 올라 타박타닥 걷는 느낌은 어떨까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막이라는 사포터우(沙坡頭)의 광활한 금빛 모래벌판 위를 사막 트레킹 전용차를 타고 질주하는 기분은 또 어떨까요. 

거기서 마주친 것은 죄다 이런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들이었습니다. 옛 실크로드의 관문이자 교역의 중심지였던 곳. 사막과 호수가 공존하고, 만리장성과 황허(黃河)강이 함께 있는 곳. 거기다가 이슬람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그곳이 중국의 닝샤후이족(寧夏回族) 자치구 성도인 인촨(銀川)시입니다. 

인촨이야말로 정반대의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이국적인 땅입니다. 지난 3월 우리나라 저비용 항공사인 ‘진에어’가 외국 국적의 항공사로는 처음 취항했습니다. 때묻지 않은 ‘미지의 땅’, 인촨의 이국적인 매력이 이제야 외지인들에게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사실 닝샤 자치구는 기후가 온화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중국 10대 휴양지’ 가운데 손꼽히는 곳이라는군요. 

닝샤 자치구는 주민 630만 명 중에서 이슬람족의 후예인 회족이 3분의 1에 달합니다. 그런 만큼 도처에서 웅장한 이슬람 사원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히잡을 두른 무슬림 여성이나 터번을 쓴 남자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면 이곳이 중국이 아닌 중동 어디쯤의 이슬람 국가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이국적인 느낌의 정점이라면 단연 사막지대였습니다. 특히 광대한 사막 바로 옆으로 인류의 문명을 피워낸 황허강이 급물살을 가르며 굽이굽이 흐르는 광경은 신기할 따름입니다. 물은 원래 모래를 쓸어내리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존재지만, 사포터우에서는 물과 모래가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 아래에는 거대한 샹산(香山) 줄기들을 병풍 삼아 아담한 호수가 자리잡고 있고, 옆으로는 만리장성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사막 가장자리에는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희귀한 장관이 펼쳐져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신비로운 자연의 모습입니다. 외국인 관광객과 공안(共安)과 비(雨)가 없는 3무(無)의 땅. 사막과 호수와 이슬람 사원이 많은 3다(多)의 땅. 인촨시를 찾아갑니다. 



중국의 4대 사막 중 가장 아름답다는 텅거리 사막이 시작되는 사포터우. 한적한 밤엔 사람의 혼을 울리는 모래의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이곳 사막에서 관광객들이 낙타 트레킹을 즐기고 있다. 파란 하늘에 금빛 물결이 춤추는 사막과 낙타 행렬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중국 서북부에 위치한 중국의 숨은 신비의 땅 닝샤후이족 자치구. 만리장성 끝자락에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자 이슬람교를 믿는 후이족의 고향이다. 이들 후이족은 약 1500년 전인 당나라 때 아랍과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상인과 병사들의 후손이다. 이 지역은 황허강이 가로지르고 있어 풍요롭고, 이슬람 문화와 동양의 정취가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 매력적인 곳이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외국인 관광객을, 인촨에서는 여행 내내 만나지 못했다. 현지인들이 한국 관광객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과 순박한 미소로 대해 주었던 것도 아마 그때문일 것이다. 통상 관광지에서는 여행자들이 현지인들에게 ‘사진을 찍자’고 청하는 법인데, 그곳에서는 정반대였다. 한국에서 온 여행자인 것을 알고는 현지인들이 번갈아가면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해 당황스럽기도 했다. 한류의 영향과 국력이 신장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드물게 보는 외국인이 더없이 신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의 다른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자주 눈에 띄는 공안들도 치안이 잘 돼서인지 이곳에선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근육의 힘이 아닌, 풍광의 힘으로 오르는 길

‘만물상’이란 이름 그대로 하나하나 닮은 사물의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것 같은 가야산의 암봉들. 그 위용이 어찌나 거대한지 사진 한 장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 만물상 한쪽의 일부분을 찍은 사진에서 암봉 위를 건너가는 등산객과 비교해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700여 년 전 낙동강 하류 일대에서 연맹국가를 이루고 있던 강성했던 고대왕국 ‘가야’. 그 땅이 뿜어내는 기운의 중심에 섰습니다. 경북 성주의 가야산. 가야산은 해인사와 홍류동이 있는 경남 합천 쪽으로, 또 경북 성주 쪽으로도 능선을 뻗고 있지만 그 기운을 제대로 느끼자면 성주 쪽에서 올라서 ‘만물상’을 딛고 서야 합니다.

바위들이 이름 그대로 ‘만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곳. 검붉게 치솟은 거친 암봉들이 마치 아우성처럼 힘차게 달리는 자리에 서니 심장의 박동까지도 빨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백운동 쪽에서 오르자면 두루마리 그림을 펼친 듯 이어지는 가야산 암봉의 끝자락쯤에는 ‘상아덤’이 있습니다. 가야산의 여신(女神)과 하늘의 천신(天神)이 만났다는 성스러운 전설이 전해지는 암봉의 무리입니다. 가야산 여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 그 이름마저 반듯합니다. 그가 상아덤에서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닦고자 밤낮없이 하늘에 소원을 빌었답니다. 

이런 정성을 갸륵하게 여긴 하늘신 이비하(夷毗訶)가 오색구름을 타고 이곳 상아덤으로 내려옵니다. 산신과 천신은 이 자리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대가야의 이진아시왕과 금관가야의 수로왕을 낳았답니다.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화려했던 단풍이 다 물러간 이즈음의 산하(山河)는 황량합니다. 이런 때 가야산을 찾아 오른 것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뒤에야 더 위용이 당당해지는 거친 암봉을 두르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만물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겨울의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이즈음이라면 신화처럼 전해지는 가야왕국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여정이 맞춤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가야산 아래 성주 땅의 성산가야의 고분에도, 이웃한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 유적에도 한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가 신라군의 기습으로 패망했던 가야왕국 시대의 이야기들이 서려 있었습니다. 어디 이뿐일까요. 성주에서 고령으로 흘러내리는 대가천 물길 곁에 무심한 듯 서있는 회연서원은 초겨울 낙엽으로 뒤덮여 적막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고, 조선시대 영남 사림파의 뿌리로 꼽히는 점필재 김종직 종택이 있는 고령의 개실마을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만이었습니다. 가야산의 만물상에서 시작한 발걸음을 성주와 고령까지 이으며, 이제는 다 스러지고 만 고대국가 전설의 흔적과 초겨울의 매혹적인 풍경을 길잡이 삼아 따라가봤습니다. 

경북 성주의 회연서원은 다른 계절도 못지않지만, 400년 된 느티나무가 내려놓은 낙엽이 서원 앞에 깔리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의 풍광이 가장 매혹적이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함께 앙상한 가지 사이로 서원 건물의 기와지붕이 그려내는 선도 아름답다.



# 근육의 힘이 아닌, 풍광의 힘으로 오르는 길

자칫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는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가야산을 오르는 만물상 코스. 초입부터 만만찮다. 가파른 사면을 따라 한참을 올라 몇 번이고 숨이 턱에 차 멈춰선 뒤에야 겨우 암봉의 능선으로 올라서게 된다. 과거 가야산을 오르는 코스는 합천의 해인사 쪽이 유일했다. 그때 가야산을 올라봤다면 그다지 거칠지 않은 유순한 산으로 기억할 법하다. 그러나 국립공원 지정 후 무려 37년 만인 지난해 10월부터 ‘만물상 코스’가 개방되고부터는 사정은 달라졌다.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올라선 뒤 암봉을 타고 넘는 코스가 여간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공원 내 탐방코스를 난이도에 따라 상, 중, 하로 구분하고 있다. 공단 직원들이 실제 산에 올라가 본 등산객들의 반응을 모아 점수를 매겨 난이도를 정한다. 전국의 국립공원 탐방코스 중 5㎞ 미만의 코스에서 난이도 ‘상’으로 분류된 곳은 모두 5곳. 그 중에서도 3㎞로 가장 짧으면서도 난이도 ‘상’으로 꼽힌 곳이 가야산 만물상 코스라니 이 정도면 말 다했다. 암봉의 능선에 올랐다고 해서 힘든 구간이 끝났다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오산이다. 바위 틈을 통과하거나 거대한 암봉을 비켜 돌아가면서 오르내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하지만 가야산 만물상 코스는 주말이나 휴일이면 탐방객들이 전국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든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백운동탐방지원센터 직원은 “한창 단풍이 물들던 지난 가을에는 한꺼번에 몰려든 산행객들로 정체가 빚어졌을 정도”라고 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만물상’이란 이름답게 기기묘묘하게 솟은 우람한 암봉의 빼어난 풍광이 팍팍해진 허벅지나 몰아쉬는 가쁜 숨쯤은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슬아슬 솟아있는 암봉을 하나씩 타고 넘을 때마다 탐방객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오름길의 끄트머리에서 다리 쉼을 하노라면 주변에서 “거참, 명산이네…명산이야”하는 찬탄쯤은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니 가야산에서 산행객의 발길을 이끌고 가는 것은 근육의 힘이 아니라 ‘장대한 풍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물상 암봉 끝자락의 상아덤을 지나 탐방코스의 갈림목인 서성대까지 당도하면 잠깐 망설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멀리 올려다보이는 칠불봉과 우두봉의 정상을 밟고 가느냐, 아니면 이쯤에서 유순한 낙엽으로 뒤덮인 계곡길을 따라 나무덱을 딛고 내려가느냐…. 하지만 제가 올라섰던 만물상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풍광이 기다리고 있는 정상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성대에서 칠불봉까지는 1시간쯤이면 넉넉하고, 여기서 우두봉까지는 15분이면 된다. 

단정하면서 그윽한 아름다움이 거기 있다

경북 영양의 반변천과 창기천의 물길이 Y자로 만나는 합수머리 남이포의 모습을 선바위에 올라서 내려다봤다. 남이포는 남이 장군이 역모를 꾀한 두 마리의 용과 싸워서 이긴 뒤 역적이 나올 지세의 기운을 칼로 잘랐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예각으로 뻗어나온 지형 끝에 세워진 정자가 남이정을 끼고 산책로가 놓여있다.


돌로 지은 정갈한 탑 하나가 이리도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을까요. 병풍처럼 펼쳐진 석벽을 끼고 흘러가는 반변천의 물길을 굽어보는 자리. 거기에 1000년 넘게 서 있는 석탑 한 기. 경북 영양의 봉감모전오층석탑입니다. 화려한 기교 없는 담박한 자태. 그 품새 한 번 정갈하기 그지없습니다. 탑 곁에는 잎을 다 떨군 느티나무가 활개치듯 서 있고, 늙은 감나무 가지 끝에는 까치밥으로 남겨둔 연시감 두어 개가 매달려있습니다. 반변천의 물소리가 잦아들면서 주위는 침묵으로 적막한데 기울어가는 초겨울 볕을 받아 탑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습니다.

이 계절에 경북 영양으로 떠나는 까닭의 팔할 쯤은 이 탑을 보기위함입니다. 국보로서의 값어치 따위는 몰라도 좋습니다. 어차피 탑에 얽혀 전해지는 이야기도 변변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눈썰미만 좀 있다면, 대번에 눈치채실 것으로 믿습니다. 보탤 것도, 뺄 것도 하나 없는 간결한 탑의 자태가 얼마나 단정한지. 그리고 이런 단정한 탑이 주변경관과 어우러져 얼마나 그윽한 공기를 만들어내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영양의 반변천. 중중첩첩(重重疊疊)의 영양 땅을 굽이쳐 흐르는 반변천 물길은 척금대의 곡강팔경(谷江八景)과 옥선대, 비파담, 세심암, 초선대와 같은 명소들을 두루 만들어 냅니다. 그 중 최고의 명승이라면 반변천과 청기천이 만나는 남이포와 선돌 일대입니다. 물길이 Y자로 합수하는 지점에 여러 쪽으로 잘라낸 케이크의 한 조각처럼 예리한 형상을 한 남이포의 모습이나 물 건너 쪽에 우뚝 솟아 그 형상을 바라보는 선바위의 풍경은 비슷한 곳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합니다.

여기다가 무속의 기운으로 출렁이는 일월산을 보탭니다. 혹 서정주 시인의 첫시집 ‘화사집’의 시 ‘신부’를 아시는지요.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저를 버리고 간 신랑을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기다리고 있다가 그만 재가 돼서 폭삭 무너지고만 신부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 신부의 이야기가 바로 일월산에 깃든 것이더군요. 첫날밤을 보내지 못한 ‘황씨부인’을 기리는 사당이 일월산의 어깨쯤에 있었습니다. 사당 앞에다 차를 멈추고 눈 흩뿌리는 산길을 타박타박 걸어 당도한 일월산 일자봉의 정상. 뼈대를 드러낸 겨울 산들이 우우 몰아치는 눈발 속에서 힘차게 산맥으로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반변천의 물길이 휘어 흐르는 자리에 1000년이 넘도록 우뚝 서 있는 영양의 봉감모전오층석탑. 초겨울의 정적 속에서 단정하게 서 있는 탑은 주위 풍경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화려한 꾸밈은 없지만 보면 볼수록 장대한 위용과 그윽한 자태에 감탄하게 된다.



# 단정하면서 그윽한 아름다움이 거기 있다

경북 영양의 반변천 물길을 낀 넓고 야트막한 구릉. 물 건너편에 낮은 병풍처럼 석벽을 둘러친 곳. 거기에 그 탑이 있다. 봉감모전오층석탑. 먼저 그 이름부터 풀어보자. 우선 ‘봉감’이란 탑이 선 마을의 이름. ‘모전(模塼)’이란 ‘전탑을 모방했다’는 뜻이다. 전탑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한다. 그런데 이 탑은 돌을 흙으로 구운 게 아니라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내 전탑처럼 지었으니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오층석탑’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다섯층을 가진 석탑이란 뜻이다.

벽돌 모양의 돌로 쌓아올린 탑은 화려하지 않다. 높이 11m의 당당한 체구를 가진 탑은 석가탑처럼 유려하지도 않고, 다보탑처럼 귀족적인 품격을 가진 것도 아니다. 봉감모전오층석탑은 날렵한 풍모의 이런 탑과는 미감이 전혀 다르다. 탑의 표정은 어찌 보면 무뚝뚝하다. 하지만 소박하면서 간결한 형태가 더없이 단정하다. 붉은 기가 도는 흑회색의 기운도 자태와 썩 잘 어울린다. 주변은 너른 구릉의 평지가 펼쳐져 있고, 탑 앞쪽에는 까치밥을 매달고 있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뒤편에는 나뭇잎을 다 떨군 당당한 느티나무 거목이 풍경을 돋보이게 한다.

뒤로 여러 발짝 물러서서 탑을 바라보면 너른 들에 1000년이 넘도록 서 있는 석탑과 몇 그루 나무들, 그리고 반변천 건너로 뼈대를 드러낸 갈모산 석벽의 풍경까지 합쳐지면 그야말로 그윽한 정취를 빚어낸다. 억새를 두른 반변천의 물길의 흐름은 침묵처럼 유장한데, 먹이를 찾는지 건너편 산자락의 노루 울음소리만 간혹 물을 건너온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통일신라시대 때의 탑의 모습은 어땠을까. 탑의 각 층의 낙수면에는 기와가 곱게 입혀졌을 것이고, 네 귀 끝에는 바람에 뎅그렁거리는 풍경이 매달려있었을 것이었다. 오랜 세월에 기와는 부서졌고, 풍경은 떨어져 나갔지만 이런 장식 하나 없이도 탑은 이렇듯 아름답다.

영양 땅에는 모전탑이 두 기가 더 있다. 우리 땅에 남아있는 모전탑이 모두 10기라는데, 그 중 세 기의 탑이 영양에 있는 셈이다. 봉감모전석탑에 이어 꼽을 수 있는 것이 삼지리모전삼층석탑이다. 산자락의 중턱쯤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탑은 암반 위에 굴러내린 큰 바위를 석탑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석탑을 절묘하게 지어 올렸다. 지금은 이층만 남아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바위로 쓴 기단의 높이가 더해져 제법 웅장한 맛을 낸다. 현리에도 ‘현동모전오층석탑’이 있다. 7m에서 한 치쯤 빠지는 높이라 봉감의 것보다 장대한 맛은 훨씬 덜하지만, 문주석에 새겨진 당초문양이 눈길을 끈다.

기왕 탑 구경을 나섰다면 현일동삼층석탑까지 함께 둘러보자. 31번 국도의 고가도로 아래쪽의 너른 들에 동그마니 놓여있는 이 탑은 몸체에 새겨진 팔부중상과 사천왕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마모되긴 했지만 돋을새김이 아직도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면, 처음 새겨졌을 때는 얼마나 더 정교하고, 빼어났을까.

일월산의 일자봉에 오르면 산맥의 능선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리망산이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

사량도의 지리망산과 불모산을 통틀어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달바위봉에서 암봉 능선을 타고 내려서는 구간. 사방이 푸른 바다이고 발밑으로는 대항의 아늑한 포구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반팔 옷을 입고 호기롭게 등반을 시작한 스위스에서 왔다는 관광객도 위태위태한 암봉 구간에서는 오금이 저리는지 자주 걸음을 멈춰 섰다.


공룡 등판의 거대한 비늘처럼 일어선 바위의 갈기. 그 위로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암릉 길을 균형을 유지하며 걷는 일은 마치 남쪽 바다를 헤엄치는 것 같았습니다. 두 팔을 날개처럼 펼치니 금세라도 바다와 하늘의 경계로 날아오를 듯했습니다. 여기는 경남 통영의 작은 섬, 사량도에 솟은 지리망산입니다. 

날카로운 암봉을 화관처럼 쓰고 있는 지리망산은 지세부터가 남다릅니다. 섬 안의 산은 물론이고 육지의 내로라하는 산과 견준대도 그렇습니다. 제 모습의 아름다움도 나무랄 데 없지만, 지리망산을 완성하는 것은 이름에 들어간 ‘망(望)’자에서 짐작되듯 ‘조망’입니다. 

‘거기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는 얘기는 아쉽게도 옅은 연무 탓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깎아지른 아슬아슬한 암봉 끝에서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 문득 고개를 들 때마다 와락 달려드는 바다와 포구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적이었습니다. 육지의 시간은 이미 겨울로 건너간 지 오래지만, 남쪽의 섬 사량도에는 아직 떨구지 않은 느티나무 잎에 초록빛이 다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계절 다 두고 구태여 지금 사량도로 건너간 것은 하루하루 겨울에 다가갈수록 차가운 대기로 세상은 더 투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차가워진다는 건 어쩌면 ‘명징해진다’는 뜻. 산정에서 보는 조망의 풍경도 그렇거니와, 세상을 보는 시야도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의 여행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량도로 건너가는 여객선의 갑판 위에서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 하나. 섬도 바다에 솟아 있으니 어쩌면 그것 그대로 ‘산’이 아닐까. 그렇게 길 위에서 되돌아보면 두고 온 일상도 그것 그대로 ‘길’이었습니다.

경남 사천의 삼천포항에서 출항한 여객선 ‘세종 1호’를 타고 사량도로 드는 길에서 마주한 다도해 풍경. 섬 산행은 바다 풍경이 펼쳐지는 등반도 등반이지만, 배를 타고 섬으로 드는 낭만적인 여정의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 지리망산이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

통영의 작은 섬 사량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유다. 산림청이 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지리망산’의 명성 때문이다. 그러니 ‘사량도에 간다’면 그건 그대로 지리망산에 오른다는 뜻이 된다. 면류관 같은, 혹은 물고기 등지느러미 같은 암봉을 이고 있는 사량도의 산에 ‘지리’란 이름이 붙여진 것을 두고 ‘거기 서면 지리산이 보인다’는 해석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외지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와 그 산을 오르내린 뒤에 붙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지리망산’이란 이름이 붙은 연유부터 이야기하자. 사량도 지리산의 본래 이름은 육지에서 가장 높은 산인 지리산을 뜻하는 ‘지리(智異)’가 아닌 ‘지리(池里)’였다. 섬 남쪽의 돈지(敦池)마을에서 북쪽의 내지(內池)마을 사이에 솟구쳐 올랐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육지에서 몰려든 등산객들은 사량도의 지리산(池里山)이란 이름에서 당연히 지리산(智異山)을 떠올렸겠고, 두 산의 공통점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장식처럼 솟은 암봉의 사량도 지리산은 거대한 육산인 지리산과는 산세로 보나 위용으로 보나 닮은 게 없다. 그래서 결국 찾아낸 것이 ‘맑은 날 사량도 지리산(池里山)에 오르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는 이야기였을 것이고, 산 이름도 지리산이 보인다는 뜻으로 ‘지리망산(智異望山)’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다가 아예 요사이는 육지의 산과 똑같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 사량도의 산은 지리망산이 아닌 불모산 혹은 달바위산으로 불러야 옳다. 대개 능선으로 몇 개의 산이 이어진 경우, 가장 높은 산의 것을 대표 이름으로 삼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게다가 진짜 거기서 지리산이 보이는지도 알 수 없다. 지리망산의 높이는 398m로 능선으로 이어진 불모산의 달바위봉(400m)보다 해발고도가 2m가 낮다. 그렇다고 지리망산에서의 조망이 불모산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달바위봉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섬의 풍경이 낫다면 더 낫다. 그럼에도 지리망산이란 이름이 앞서는 건 아마 육지의 지리산 명성에 힘입은 때문이리라.

# 공룡의 등비늘 같은 암봉의 화려함

사량도에 닿는 배는 경남 통영의 가오치항에서도, 사천의 삼천포항에서도, 고성의 용암포 선착장에서도 뜬다. 사량도가 속한 행정구역이 통영이니 가오치항에서 뜨는 배편이 가장 잦긴 하지만, 삼천포항이나 용암포 선착장에서 뜨는 배편도 하루 서너 번은 된다. 대개의 섬들이 행정 지원을 받는 배편 하나로 겨우 육지와 드나드는데, 사량도는 육지 세 곳과 연결되는 배편을 갖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그건 그만큼 지리망산을 찾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륙의 내로라하는 명산을 다 놓아 두고 등산객들이 사량도로 들어가 지리망산을 찾아가는 건 공룡 등판의 거대한 비늘 같은 등줄기에서 좌우로 아찔한 직벽 아래 바다를 두고 아슬아슬 걷는 맛이 그만이기 때문이다. 지리망산은 자칫 한 발만 헛디뎌도 ‘그걸로 끝’일 것만 같은 현기증 나는 아찔한 산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말갈기 같은 암봉의 거친 능선을 걷는 내내 사방으로 터진 조망이 빼어남은 더 말할 게 없다. 섬의 산은 풍광은 빼어나지만 대개 코스가 짧아 아쉬운데 지리망산은 400m를 넘기지 못하는 높이에도 종주 등반으로 능선을 이어붙이면 4시간 이상의 제법 벅찬 산행 코스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거기에다 지리망산엘 가는 이유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섬으로 떠나는 낭만적인 행로가 등산의 부록처럼 따라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리망산은 육지의 내로라하는 다른 산들이 황량한 풍경을 갖게 되는 겨울철이 특히 매혹적이다. 한겨울에도 남쪽 바다의 섬이라 바람에 훈기가 느껴지는 데다 활엽수들이 잎을 떨구고 난 뒤, 눈이 시도록 푸른 바다와 말갈기 같은 암봉을 오히려 더 근사하게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리망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다. 칼날 같은 바위능선을 네 발로 기어가야 하는 구간이 적지 않다.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하는 코스도 있고, 바위 직벽을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구간도 있다. 위험 구간을 우회하는 코스가 올 들어 새로 놓여서 길이 좀 순해지긴 했다지만, 아무래도 더 빼어난 절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는 이른바 ‘위험 구간’에 들어섰을 때다. 위험 구간에 올라서 능선의 칼바위를 붙잡고 발끝으로 온몸의 균형을 유지하다 보면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남쪽의 땅끝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사량도까지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지리망산을 찾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은….

제주 올레 마지막 길에서 만난 세 장의 그림

제주 올레길은 섬을 한 바퀴 도는 화살표를 따라 분명한 코스가 나있지만, 그 길을 벗어나 제주 여행에서의 ‘걷기’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래서 이즈음 제주에서는 올레길을 벗어난 곳에서도 걷기 여행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사진은 해질 무렵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새별오름 능선을 걷는 도보 여행자의 모습.


2007년 9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에서 출발한 제주 올레길이 이 달말쯤 제주 섬을 한 바퀴 다 돌아 5년 만에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당도해 마침표를 찍습니다. 시흥리와 종달리라니 시작과 끝의 마을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올레길이 출발하는 시흥리는 시작을 의미하는‘비로소 시(始)’ 자를 쓰고, 섬을 다 돌고 도착하는 종달리는 ‘끝 종(終)’ 자를 쓰니 말입니다.해안과 중산간, 마을의 흐려진 길을 한데 붙여 이어낸 올레길은 참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습니다.

먼저 그 길은 ‘걷는다’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고, ‘걷는 일’이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목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멀미 나는 속도로 살아온 도시 사람들이 그 길 위에서 만난 것은 아름다운 경관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위안과 치유를 만났습니다.

가끔은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서서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 길 위에서 였습니다. 무릇 여행이라면 그곳의 사람들과 따스하게 교유해야 한다는 것도 그 길에서 배웠습니다.여행의 방법부터 삶의 방식까지…. 올레길이 우리들에게 축복처럼 선사한 것은 너무도 많습니다.

완전 개통을 앞두고 올레길의 마지막 구간 21코스를 미리 둘러봤습니다. 코발트빛 바다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우도와 성산일출봉, 비스듬히 기운 가을볕을 받아 아름답게 물결치는 억새군락, 해가 넘어가고 난 뒤 핏빛 노을을 배경으로 중산간의 구릉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 청명한 가을날, 올레길과 오름을 딛고 가면서 제주에서 만나고 온 것들입니다. 여기다가 내친김에 몇 곳의 코스를 더 돌면서 차곡차곡 쌓여진 이야기도 찾아가 봤습니다.



# 제주 올레 마지막 길에서 만난 세 장의 그림

제주 동쪽에서 놓기 시작한 올레길이 5년여 만인 오는 24일 섬을 한 바퀴 돌아 출발지점으로 돌아온다. 총연장 400㎞가 넘는 올레길의 완전 개통이 목전에 다가왔다. 

마지막 길, 그 얘기부터 하자. 올레길 마지막 구간인 21코스는 섬 동쪽의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끝이 난다. 올레길이 끝나는 지점의 마을 이름 ‘종달(終達)’을 한자로 풀자면 ‘끝에 다다르다’는 뜻. 그러고 보니 올레길 제1구간이 시작되는 곳은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다. ‘시흥(始興)’의 ‘시’가 시작을 의미하니 올레길의 시작과 끝은 일찌감치 마을 이름에 담겨 있는 셈이다. 

마을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몇 가지.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고종달이란 사신을 제주에 보냈는데 그가 처음 당도한 곳을 종달마을이라 이름 붙였다는 얘기. 또 제주 서쪽 두모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머리 두(頭)’ 자를 써서 제주도의 머리이고, 종달리는 ‘마칠 종(終)’ 자를 써서 제주도의 꼬리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제주 땅을 다스리던 목사(牧事)가 부임해 오면 지형도 익히고 민심도 살필 겸 섬을 한 바퀴 도는 ‘탐라순력’을 나섰는데, 그 출발 지점과 끝의 마을에 시와 종 자를 넣었다고도 전한다. 

제주 올레 21코스는 제주 해녀박물관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해안을 따라 별방진과 각시당, 토끼섬 앞과 하도해수욕장을 지난다. 제주의 해안 풍경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만 이 구간에서 최고의 풍경을 보여주는 곳은 바로 해안 쪽에 딱 붙어 솟아오른 오름 지미봉이다. 지미(地尾)란 이름은 ‘땅의 꼬리’란 뜻. 올레길 마지막 구간으로 어찌나 딱 맞는 작명인지, 길이 여기까지 당도하길 기다려 이름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제법 가파른 사면을 올라 지미봉의 정상에 서면 도대체 어디다 시선을 둬야 할지 망설여질 법하다. 사방 360도로 가장 ‘제주다운 풍경’을 담은 세 장의 그림이 펼쳐지니 말이다. 

먼저 바다 쪽으로 보이는 한 장의 그림.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코발트빛 바다를 앞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풍경. 수심에 따라 채도가 달라지는 눈부신 청색의 바다 위로 고깃배들과 유람선들이 오가고, 내륙 안쪽에는 겨울의 초입에도 성성한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밭들이 펼쳐져 있다.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면 이번에는 두 번째 그림 한 폭이다. 한라산을 정점으로 제주 동쪽의 오름군락들이 첩첩이 겹쳐진다. 멀찌감치 물러서서 바라보는 오름의 부드러운 선들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여기서 다시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줄곧 딛고 온 하도 쪽을 바라보면 세 번째 그림이다. 바다 쪽으로 불쑥 내민 곶 형태의 지형에 바다를 배경으로 빨간색과 파란색의 지붕을 얹은 집들이 ‘동화 속 세상’처럼 펼쳐진다. 한자리에서 제주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 세 장이 펼쳐지니 여기서 더 무엇을 바랄까. 지미봉은 이른바 올레길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데 추호의 모자람도 없다.

말목산 빼어난 풍광에 발목을 잡히다

가을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는 충주호의 물길을 따라 유람선이 미끄러지는 모습을 제비봉의 계단길에서 내려다봤다. 유람선을 타고 보는 충주호의 가을 풍경도 빼어나긴 하지만 이쪽 자락의 제비봉이나 호수 건너편으로 보이는 말목산에 올라서 바라보는 경관에는 미치지 못한다.


설악산 대청봉에 첫 눈. 몇 번의 찬비 뒤에 계절의 걸음이 더 빨라졌습니다. 좀 더 머물렀으면 좋으련만, 더불어 남하하는 단풍의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이제 단풍은 중부지방을 넘어 남도를 향해 맹렬하게 내려가고 있습니다. 서두르셔야 하겠습니다. 이번 주말이 중부 내륙 쪽에서는 절정의 단풍시즌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 듯하니 말입니다.

단풍이 불붙은 이즈음은 어디든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가을철 여행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으로 물든 장쾌한 산자락과 불붙은 단풍으로 포위되다시피한 고즈넉한 산사의 매혹적인 풍경입니다. 이름난 명산들이 가을이면 단풍놀이 행락객들로 넘쳐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단풍의 절정 무렵에 이름난 명산을 찾았다가는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산에 오르기 십상이고, 정작 단풍보다는 울긋불긋 등산복만 보다가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한꺼번에 몰려든 행락 차량들로 짜증나는 교통 체증을 견뎌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몇 해 동안 단풍의 행로를 쫓았던 경험으로 미뤄본다면,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물’과 함께 있을 때입니다. 이름난 산이 보여주는 단풍의 색감도 빼어나긴 하지만, 고요한 호숫가의 단풍 색감이나 자태만큼 매혹적이지 않았습니다. 가을의 호수는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명산들보다 훨씬 더 고즈넉한 데다 걸음을 멈추고, 혹은 차를 세우고 호반의 풍경을 오래도록 가슴에 담을 수 있습니다. 절정의 단풍을 만날 수 있는 때를 겨눠서 충주호를 찾아간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충주호의 호안은 지금 온통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처럼 붉고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호수의 단풍. 그 화려한 자태와 정취를 ‘완벽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나섰다가 세 곳을 찾아냈습니다. 충주호를 끼고 있는 두 개의 산과 하나의 길입니다. 충주호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서있는 말목산과 제비봉, 그리고 충주호를 감아도는 비포장 드라이브 코스까지, 단풍으로 물든 기막힌 호수를 굽어보는 세 곳의 자리를 살짝 공개합니다. 이 세 곳을 찾아가는 행로를 따라오며 주의할 점은 단 한 가지. 늦어도 이번 주말은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포장도로와 비포장길이 교대로 이어지는 충주호 호안도로. 울긋불긋 물든 붉고 노란 단풍이 수면에 비치는 만추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달리는 길이다.




# 말목산 빼어난 풍광에 발목을 잡히다

충주호를 끼고 솟은 말목산. 월악산국립공원의 동북쪽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산이지만, 말목산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충주호의 유람선을 타 봤다면 혹 이 산의 자태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충주호 유람선이 뜨는 장회나루에서 충주호 건너편으로 긴 능선을 벼랑을 드러내며 우뚝 솟아있는 산이 바로 말목산이니 말이다.

말목산은 행락객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른바 ‘산꾼’들의 발길도 드물지만, 가을 충주호의 단풍을 조망하는 명소 중 가장 앞자리에 당당히 놓을 만하다. 그만큼 말목산 능선에서 바라다보이는 단풍이 물든 충주호 전망은 빼어나다. 능선을 따라가다 만나는 몇 곳의 아슬아슬하게 깎아지른 벼랑의 조망지점에 서면, 산자락의 한쪽 사면에 융단 같은 숲의 울긋불긋한 단풍과 함께 그 아래로 호수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을 그으며 호수 위를 유람선이 오가면 그대로 한 폭의 그림과 다름없다.

말목산의 해발 고도는 720m. 높지 않은 산이지만 오르는 길은 그리 녹록지는 않다. 국립공원 지역임에도 탐방로가 놓이지 않아 길은 ‘딱 잃지 않을 정도’로 흐리다. 산행은 단양군 단장면 하진리 마을에서 시작한다. 산행 내내 표지판이라고는 ‘말목산 등산로입구’와 정상석에 새겨진 ‘말목산’ 딱 두 개뿐.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급경사면을 차고 올라야 하는 구간도 제법 길다. 

하진리 마을 앞의 등산로 표지판에 그려진 시간대로라면 말목산 정상까지는 2시간 안쪽이면 닿는다. 하지만 일순 하늘이 툭 터지는 돌너덜 구간이나, 깎아지른 벼랑 지형에서 바라다보이는 조망 앞에서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다. 턱까지 닿는 가쁜 숨이나 뻐근한 허벅지가 아닌, ‘빼어난 경관’이 도무지 발목을 붙들고 속도를 낼 수 없게 만든다는 얘기다. 

말목산의 능선의 조망지점에서 내려다보는 충주호는 호수라기보다는 말목산과 맞은편 제비봉 사이로 흐르는 물길처럼 보인다. 지금 말목산의 가파른 능선에도, 물 건너편에 마주 선 제비봉 사면에도 온통 울긋불긋한 단풍이 카펫처럼 펼쳐져 있다. 제비봉의 허리춤에는 길고 가늘게 36번 국도가 지나가고, 그 길이 닿는 장회나루에는 수면에 비친 단풍색의 물길을 따라 유람선이 들고 난다. 다른 산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런 풍경이야말로 말목산이 만추 무렵에 선사하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말목산 정상 부근의 벼랑에서 내려다본 충주호의 모습. 산 능선에 단풍의 물결이 융단처럼 펼쳐졌다.

수백년 동안 마법이 풀리지 않는 도시, 프라하

중세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빼어난 자연풍광을 간직하고 있는 체코의 프라하. 프라하를 가로질러 흐르는 블타바 강변의 레텐스케 공원 언덕 위에서 카를교 부근을 내려다봤다. 가을날 오후 햇살이 비껴든 블타바 강변의 풍경이 요즘 이렇다. 프라하가 한해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바로 지금이다.


중세의 신비를 간직한 마법 같은 도시. 그곳이 바로 체코의 프라하입니다. ‘2주 동안 주어진 휴가의 마지막날’이라고 했습니다. 프라하 복판을 흘러내리는 블타바강을 내려다보는 레텐스케 공원의 언덕에서 만난 포르투갈 리스본의 바클레이스 은행 직원 레노 루스(36). 저물녘의 프라하 풍경을 카메라로 담고 있던 그는 프라하를 두고 “내가 가본 곳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했습니다.

석양이 비껴드는 만추의 프라하 풍경을 바라보다 그는 거의 울 뻔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튿날이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는 “휴가 일정의 마지막 목적지를 프라하로 택한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고 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누군들 가을이 물들고 있는 이 언덕에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블타바 강변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불빛이 하나 둘 켜질 무렵 ‘언제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습니다.



# 수백년 동안 마법이 풀리지 않는 도시, 프라하

‘마법의 도시’. 체코의 프라하를 이렇게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16세기 체코 땅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2세. 그는 평생을 연금술에 몰두했다. 구리를 금으로 만들겠다는 부질없는 욕망으로 세계 곳곳의 연금술사와 마법사들을 프라하로 끌어모았다. 중세의 프라하는 검은 망토를 입은 마법사들이 그림자처럼 오가던 도시였다. 연금술의 실패는 묻지 않아도 알 일이고 주술과 마법도 일찌감치 폐기됐다. 서양에서 연금술이란 어떤 물질로 금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도를 통해 죄지은 인간을 완전무결한 인간으로 바꿔놓는다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었다. 

그렇다면 프라하는 아직 여전히 ‘마법의 도시’다. 마법사들의 주술과 마법은 사라졌지만, 연금술은 프라하에 아직도 살아있다. 수많은 전설과 웅장한 중세 건축물 그리고 몽환적인 이미지까지 더해져 프라하를 찾아온 여행자들에게 완전무결한 풍경을 보여주니 말이다. 

경관이 빼어난 이름난 곳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각의 돌을 촘촘히 박아 포장한 뒷골목이나 호박색 맥주를 내오는 떠들썩한 선술집에서도 이런 마법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단언컨대 이 도시는 건조하게 서걱거리는 무뚝뚝한 이의 감성조차 스펀지처럼 촉촉하게 적신다.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속도는 체코가 우리나라보다 좀 빠르다. 이즈음 프라하는 만추로 접어들었다. 프라하의 복판을 흘러내리는 블타바 강변의 활엽수들은 선명한 색조로 물들었다. 중세도시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만으로도 매혹적인 도시에 짙은 색감의 단풍까지 더해졌으니 그야말로 ‘치명적’이다. 누구에게든 일생에 단 한 번 체코의 프라하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계절은 가을이 돼야 마땅하리라. 

프라하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의 온천 휴양도시 카를로비 바리. 온천수가 흐르는 물길 주위로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들어서 마치 동화 속의 풍경같다.

가을 대청호를 가장 아름답게 굽어보는 자리

‘내륙의 한려수도’라는 대청호를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자리. 그게 여기 충북 청원의 구룡산 삿갓봉 정상이다. 삿갓봉 정상에는 나무로 깎은 용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그 뒤로 만수위를 이룬 대청호의 물줄기가 펼쳐진다.


만수(滿水). 가을 대청호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찰랑거리는 호반에 하루하루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이면 차가워진 가을 호수의 수면 위로 어김없이 물안개가 피어올랐습니다.
물안개 속에서 물에 잠긴 버드나무들이 머리를 헝클고 서 있고,
이따금 생각난 듯 고요한 수면 위로 물오리떼가 날아올랐습니다. 일찍 깨어나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고 물가로
들어가 이런 풍경 앞에 섰습니다. 호수의 수면에는 작은 물살 하나 그려지지 않아 마치 정물과도 같았고,
대기는 촉촉했습니다. 문득 어디선가 첼로의 선율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거기서 눈치챘습니다. 대청호는 지금 한 해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건너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 말입니다.



# 가을 대청호를 가장 아름답게 굽어보는 자리

충북 청원이 아름다운 것은 대청호가 있기 때문이고, 대청호가 올가을에 유독 아름다운 것은 물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호수가 만수위를 이루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저수지며 댐은 늦여름이면 집중 호우에 대비하느라 물을 뺀다. 그래서 해마다 이즈음이면 저수지며 댐은 물이 빠져 만수위를 이뤘던 자리를 마치 화물선의 흘수선처럼 거칠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지금 대청호는 호안(湖岸)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의 밑동까지 물이 가득 차 찰랑거리고 있다. 아마도 늦여름에 연거푸 내습해 많은 비를 뿌리고 간 두 번의 태풍 때문이리라.

가을빛으로 물들어 출렁이는 대청호를 찾아 나선 길. 대청호를 내려다보는 가장 아름다운 전망대가 그곳에 있다고 했다. 충북 청원의 구룡산(九龍山·373m). 아홉 마리 용이 모여 있는 산세라고 아홉(九) 용(龍)의 이름을 가진 산이다. 구룡산은 대청호에 딱 붙어서 솟아 있어 최고의 전망을 자랑한다. 산은 절집 현암사가 있는 호반의 벼랑 쪽으로도, 반대편의 진장골 장승공원 쪽으로도 오를 수 있다. 원점으로 회귀하는 산행이라면 현암사 쪽에서 오르는 편이 더 낫겠다.

# 현암사를 타고 넘어 구룡산 삿갓봉까지

청남대의 산책로 ‘노태우 대통령길’ 초입의 음악분수 주변의 메타세쿼이아 산책로. 아직 푸른빛이 청청하다.
현암사 아래 호안도로의 주차장에서 구룡산 삿갓봉 정상까지는 1시간 남짓이면 족하다. 굳이 등산이랄 것도 없어, 운동화 차림으로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순한 산길이다. 먼저 제법 가파르게 놓인 철제계단을 올라 빗질 자국 정갈한 마당을 가진 현암사부터 딛는다. 가파른 절벽에 위태롭게 앉은 절집 현암사는 전망이 압권이다. 현암사 마당에서는 대통령 별장이었던 청남대가 대청호 건너편에 정면으로 보인다. 현암사가 장쾌한 경관을 지니고 있다는 건 한때 절집에 정부 기관원들이 상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사연인즉 이렇다. 청남대가 대통령 별장으로 쓰이던 시절, 정부 부처에서 절집 철거 압력이 끊이질 않았단다. 그러나 스님들은 ‘좋은 자리로 이전해주겠다’는 제의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대통령이 청남대에 내려올 무렵이면 기관원과 형사 8명이 현암사에 올라와 아예 상주하면서 신도들을 감시하기도 했단다.

현암사까지만 해도 만족할 만한 풍경이지만 내처 삿갓봉까지 오르면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호수 풍경을 볼 수 있다. 삿갓봉 위에 서면 대청호와 호수를 둘러싼 산자락들이 모두 발아래다. 해발 400m에도 못 미치는 높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시야가 장쾌하다. 대청호에 왜 ‘내륙의 다도해’란 별명이 붙었는지 금세 이해가 된다. 물이 그득한 대청호를 구불구불 들고나는 호반이 마치 서남해의 리아스식 해안처럼 펼쳐진다. 이제 막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지금의 풍경도 이럴진대, 울긋불긋 단풍이 호수까지 내려온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저릿해진다.

삿갓봉 정상에는 통나무로 잘 깎은 흑룡이 한 마리 있다. 꼬리부분을 돌로 돋워놓은 땅에 묻고 있어 마치 산 정상의 땅에서 솟아 승천하려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산정(山頂)의 용이 대청호의 물길을 허리 아랫부분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물의 꼬리를 가진 용 한 마리. 그 용이 화창한 가을 햇살 속에서 서늘한 바람이 지나는 구룡산에 있다.

# 물길을 따라 수몰나무를 끼고 걷다 

구룡산의 현암사 아래쪽에는 대청댐이 있다. 댐 아래로 흘러내린 물은 청원 땅과 대전 땅을 가르며 금강에 합류한다. 물 이쪽이 청원이고 건너편이 대전이다. 지도 위의 행정구역은 선명하게 단절돼 있지만, 실제의 경계는 희미하다. 대청댐 아래 물길을 가로질러 놓은 짧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대전이니 말이다.

예까지 와서 ‘전국 최고의 수변산책로’로 꼽히는 대전의 ‘로하스 해피로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영문으로 붙여진 길 이름이 못내 못마땅하긴 하지만, 대청공원에서 호반가든까지 이어지는 1.5㎞ 남짓의 수변 덱은 떨어진 낙엽들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려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덱이 지나가는 물가에는 무릎까지 물에 잠긴 수몰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수몰나무의 실루엣이 수면에 반영돼 데칼코마니처럼 찍히는 모습은 ‘황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런 풍경 위로 순백의 왜가리와 백로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고 오리떼 일가족은 물 위에 동심원을 그리면서 내려앉더니 점잖게 미끄러진다.

이 길을 걷는 것이 어찌나 낭만적인지 아무리 무뚝뚝한 사람일지라도, 그 길에 데려다 놓는다면 금세 가을의 색감에 젖어 마음이 촉촉해질 게 틀림없겠다 싶다. 수변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나무로 세운 정자와 벤치가 있고, 안쪽에는 너른 잔디밭도 펼쳐져 있다. 강이 바라다보이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혹은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펴고 둥글게 모여 앉아서 가을 소풍을 즐긴다면 이 짧은 가을을 보내는 데는 더할 나위없겠다.

멀고도 낯선 지구 반대편의 땅, 페루

국내에는 페루의 여행지로 마추픽추만 알려져 있지만, 그 못지않은 명소들이 곳곳에 있다. 페루 중남부 태평양 연안의 샌프란시스코 사막.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사막을 바람이 지나가면서 모래 위에 빚은 결들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런 사막에서는 사륜구동 차량을 이용한 투어와 함께 급경사의 모래사구에서 스노보드를 타는 ‘샌드보딩’을 즐길 수도 있다.


풍경 하나. 지구 반대편 남미 대륙의 페루. 안데스 고원의 티티카카 호수에 당도한 것은 늦은 밤이었습니다. 산맥의 구름 뒤로 마른 번개가 번쩍이는 캄캄한 비포장 길을 따라 몇 시간째 달려간 곳. 자그마치 해발고도 3810m. 산소마저 희박한 그곳에 거짓말처럼 거대한 담수호가 있었습니다. 그 밤에 티티카카 호반의 숙소 테라스에 나와 섰을 때였습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돔형의 스크린 같은 밤하늘이 온통 황홀한 별로 가득했습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호수 위로 쏟아져 내리는 별들…. 믿을 수 없을 만치 아름다웠던, 그날의 밤하늘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두번째 풍경은 태평양을 끼고 있는 페루 중부 해안의 막막한 사막에서 만났습니다. 와카치나 사구와 샌프란시스코 사막이 그려내는 끝없는 모래의 곡선은 유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황량한 사막 위의 바람이 제가 지나간 길 뒤로 물결 모양의 잔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발자국이 그리는 선과 그림자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걸 거기서 처음 알았습니다. 여기다가 사륜구동 차량으로 저물어가는 사막 한복판으로 들어가 텐트를 치고 즐겼던 한 끼의 식사의 낭만을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경험으로 보탭니다.

페루 중부 해안의 작은 섬 바예스타. 이른바 ‘작은 갈라파고스’라 부르는 곳에서 목격한 ‘살아있는 자연’을 페루에서 만난 세번째 풍경으로 꼽습니다. 둥근 아치 형상의 세 개의 바위섬에는 가마우지, 펠리칸, 펭귄, 물떼새 등 바닷새들이 무려 100만 마리나 머물고 있었습니다. 해안가에는 수천 마리에 이르는 바다사자들이 번식기를 앞두고 무리를 이루고 있더군요. 배를 타고 다가서면 바다사자들이 바위에서 물로 뛰어들었고, 물러서면 섬을 뒤덮은 바닷새의 무리들이 일제히 날아올랐습니다. 작은 섬에서 자연이 있는 그대로 숨 쉬고 있는 모습은 배의 난간을 붙들고 선 이들의 가슴을 벅차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구름을 이마에 두르고 있던 안데스 산맥의 위용을 마지막 풍경으로 꼽습니다. 그렇다고 안데스의 위용과 감동이 덜하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앞선 풍경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기대하지 않았다가 의표를 찔린 것들인 데 반해 안데스의 위용과 감동은 익히 기대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잉카제국의 ‘공중도시’라는 마추픽추가 그랬고,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의 독특한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페루 여행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마추픽추는 기대가 컸지만, 거기에 당도해서 만난 풍경은 정확하게 그 기대만큼이었습니다. 잉카제국의 신전은 거대했고 그 험준한 산정에 만들어 놓은 도시는 말 그대로 ‘불가사의’, 그것이었습니다.

무릇 도전적인 여행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낯선 것들과의 충돌’입니다. 제 사는 곳의 형편과는 전혀 다른 광경을 만날 때 감동은 커지고, 사유 또한 깊어지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정반대인 남반구의 땅 페루는 낯선 풍경들로 가득한 완벽한 도전의 여행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익숙한 것들과의 충돌은 비단 풍경만은 아니었습니다.

지도 속의 추상으로만 존재했던 지구 뒤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만남은, 그것 그대로 경이였습니다. 페루의 수도 리마 외곽의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빈민촌, 평생을 갈대로 띄운 호수 위의 네댓 평짜리 섬에 사는 수상가옥, 사방의 산군(山群)들이 벽처럼 솟아 있는 안데스 고산지역의 잉카 후예들의 남루한 삶…. 이들이 지구 반대편의 우리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깨달음조차 모두 경이였습니다.

안데스 고원의 티티카카 호수. 해발고도가 3810m로 전 세계의 뱃길이 있는 호수 중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호수다. 안데스의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물이 가둬져 만들어진 호수는 하늘을 비춰내는 맑은 물빛이 가장 인상적이다. 티티카카 호수에서는 전통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들을 찾아가는 투어를 즐길 수 있다.



# 멀고도 낯선 지구 반대편의 땅, 페루

페루는 멀다. 비행시간만 갈아타는 시간까지 합쳐서 도합 서른 시간쯤이니 말 다했다.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심리적인 거리도 못지않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잉카 유적 ‘마추픽추’나 ‘나스카’의 지상 그림 같은 수수께끼의 이미지로 가득한 곳들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알려진 명소도 거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 페루는 마추픽추로만 이해될 수 있는 여행지는 아니다. 여행 목적지로 페루는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다. 우선 기후부터가 그렇다. 페루에서 계절 구분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의미도 없다. 1년에 고작 1.5㎜ 남짓의 비가 내리는 사막의 땅이 있는가 하면, 축축한 습기로 휘감긴 열대우림이 있고, 해발고도 4000m를 오르내려 여행자들을 고산증(高山症)에 시달리게 하는 안데스의 고원지대도 있다. 지역과 기후마다 풍경과 삶의 모습이 어찌나 다른지 같은 나라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멀고 낯설다는 건 곧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뜻이다. 호기심이야말로 여행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태평양의 바다를 마주하고 펼쳐진 거대한 태평양 연안의 사막도, 늘 머리에 흰 구름을 이고 있는 안데스 고원의 깎아지른 협곡도, 하늘을 담고 있는 고원의 거대한 호수도 모두 다 낯선 풍경들이다.

어디 이뿐일까. 도처에 펼쳐진 잉카문명의 유적도, 여전히 잉카의 전통을 지탱하고 사는 후예들의 삶도, 잉카 멸망 후 구축한 스페인 식민지풍의 경관도 모두 흥미롭다. 익숙함, 혹은 관성으로 지탱해 온 삶이 지루해진다면, 지구 반대편의 땅, 페루 땅에 가볼 일이다.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다 빼고 무책임하게 제안한다면 그렇다. 같은 비용과 시간이 전제하고, 상대적으로 다른 여행지에 비교한다면 페루로의 여정은 다른 여행지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얘기다.

세밑에 우리 국토의 끝을 찾아가는 이유

백두산에서 ‘두(頭)’자를 가져오고, 곤륜산에서 ‘륜(崙)’자를 가져왔다는 두륜산의 노승봉 암봉 끝에 올라서 대흥사 쪽을 바라봤다. 길게 휘어 안은 산줄기 아래 딱 맞춤한 자리에 대흥사가 들어서 있고, 그 너머로 몇 개의 크고 작은 산자락, 또 멀리 바다 건너 진도 땅이 바라다보인다.


땅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저녁
파도소리에
동백꽃 집니다.


거기서 고은 시인의 시 ‘땅 끝’을 읽었습니다. ‘살아온 날들’을 함께 데리고 와야 할 곳, 이곳은 땅끝마을이 있는 전남 해남입니다. 겨울의 초입에 몰아친 거센 눈발과 날 선 추위를 피해 남녘으로 내려온 길입니다. 기대했던 것처럼 땅끝에는 배추밭과 마늘밭의 초록이 여태 남아 있었고, 해안가 빈 밭의 황토에서도 따스한 훈김이 느껴졌습니다.

끝은 되새겨보자면 ‘시작’이기도 합니다. 우리 땅이 거기서 끝난다고 ‘땅끝마을’이란 이름을 붙여 두긴 했지만, 반대로 우리 땅은 거기서 시작하기도 합니다. 세밑에 끝과 시작을 만나러 간 길. 동백꽃은 아직 멀었다지만, 대둔산 자락의 대흥사 법당 뒤편 동백나무의 꽃눈에서는 벌써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더군요. 땅끝마을이 되려 ‘땅의 시작’으로도 읽히듯 겨울도 계절의 끝은 아닌 것이지요.

해남 땅에는 내로라하는 명필들의 글씨를 현판으로 걸고 있는 두륜산 아래 대흥사도 있고, 불꽃 같은 달마산의 암봉을 화관처럼 두르고 있는 정갈한 절집 미황사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뒷산의 비자나무 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비가 내리는 듯하여 녹우당이란 이름을 가진 고산 윤선도의 고택도 있고, 겨울이면 철새떼들이 편대를 이뤄 날아와 저물녘까지 수런거리는 고천암호도 있습니다. 다른 계절에도 나무랄 데 없긴 하지만, 해남이 가진 이런 풍경들은 겨울에 오히려 더 반짝입니다.

이런 풍경이 없다고 해도 어떻습니까. 해남은 가장 먼 곳이어서, 또 우리 땅의 끝이어서 꼭 한번 발을 디뎌볼 곳입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세밑에 떠나는 여행지로 이만 한 곳이 없을 듯합니다. 한 해의 끝을 향해 줄달음치는 가뜩이나 바쁜 시간에 멀고 먼 땅 해남으로의 여정을 권하는 것은 ‘땅의 끝으로 가는 것’이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보는 일’에 다름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해남의 땅 끝에 서서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 제 안에 숨어 있는 병아리 솜털 같은 작고 따스한 희망을 가만히 만져 보시지요. 이렇게 세밑에 혹 땅끝으로의 여정을 계획했다면, 시인처럼 ‘살아온 날들’과 꼭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차가운 겨울비가 몰고온 해무로 가득한 고천암방조제 부근의 빈 논 위로 철새 떼가 대열을 이뤄서 날고 있다. 고천암호에는 지금 가창오리와 기러기, 논병아리들이 날아와 수런거리며 겨울을 나고 있다. 고천암에는 철새를 보러 가지만, 철새가 없다 해도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빈 논의 풍경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 세밑에 우리 국토의 끝을 찾아가는 이유

겨울이 깊어가는 세밑에 남녘의 땅 끝으로 간다. 땅끝이 있는 해남으로 간다. 해남의 땅 끝에는 뾰족하게 새겨진 토말비가 우리 국토의 끝임을 알리며 서 있지만, 땅끝에서 마음을 사로잡는 건 날카롭게 서 있는 토말비보다는 땅끝 가는 길의 고은의 시비다. “땅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저녁/ 파도소리에/ 동백꽃 집니다.” 제가 서 있을 장소에 맞춤처럼 서 있는 시비다. 어디였더라. 설악산 아래 백담사에도 고은의 시를 새긴 시비가 서 있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갈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이치, 그리고 ‘살아온 날들을 다 데리고’ 땅 끝에 서는 자세가 어쩐지 닮아 있다. 국토의 위와 아래 한 시인의 절창(絶唱) 같은 시비가 하나씩 서 있는 셈이다.

해남의 땅끝을 말하면서는 수사(修辭)를 치렁치렁 달지 않기로 하자. 거기 무엇이 있고, 어떤 풍경이 아름다운지는 설명하지 않기로 하자. 어차피 땅끝은 굳이 일러주지 않는다 해도 다 찾아올 곳이다. 그곳의 매력이나 풍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 국토의 끝’이라는 ‘장소성’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곳이란 얘기다. 땅끝은 단체관광버스로 행락을 겸해 찾아가는 곳은 아니다. 그렇게 땅끝을 찾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땅끝은 상처받고 좌절한 사람들이거나, 과거를 끊고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는 이들의 여행지다. 풍요한 이들보다 결핍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란 얘기다. 그래서 그곳은 비장하기도 하고, 향기도 짙다. 왜 그렇지 않은가. 누구나 다 이기고 싶어하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이긴 사람보다 진 사람의 흔적이 더 따스하고 마음이 가는 것 말이다.

지금처럼 깊어가는 겨울에도 땅끝을 찾는 이들은 적지 않다. 일찍 어둠이 내리는 세밑의 겨울날에 이 멀고 먼 땅끝까지 오는 이유는, 살을 에는 거친 겨울 바닷바람 속에 호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고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차가운 땅끝에 찾아오는 이유는, 거기서 위안을 얻고, 새로 시작할 용기를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땅끝을 찾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땅끝’이란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길고 먼 행로 속에서 자신 앞에 가로놓인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뜨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땅끝에 선 날은 종일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바다 저쪽에서 밀려온 운무가 세상을 온통 안개로 지워 버린 사이로 또 한 사내가 땅끝의 토말비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제주에서 건축과 미술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한라산 중산간에 지어져 지난해 11월 개관한 ‘본태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못. 안도 다다오는 바다 쪽으로 열려 있는 건축물 앞쪽 공간에 연못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제주의 하늘을 담아냈다. 현무암으로 이뤄진 화산섬인 제주에서는 호수나 연못을 찾아보기 어려우니 이런 광경은, 말하자면 ‘제주에는 없는 풍경’이다. 건축으로 빚어낸 새로운 미감인 셈이다.


혹시 아시는지요.

제주의 자연 속에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지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하나씩 들어서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마리오 보타, 이타미 준(伊丹潤), 리카르도 레고레타…. 그 이름만으로도 흥분되는 건축계의 세계적인 거장들입니다. 

그들이 제주의 자연 속에 빚어낸 공간을 찾아나섰습니다. 대가들의 건축물 앞에서 봐야 할 것은 건물이 그려내는 선과 면, 공간적 균형만이 아니더군요. 제주의 빛과 바람, 그리고 풍경을 공간 내부로 끌고 들어온 건축물 앞에 비로소 알아챘습니다.

건축이 때로는 제주의 자연을 더 극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액자’의 기능을 한다는 걸 말입니다. 거기서 제주의 빛과 바람과 풍경을 보는 방법을 한 수 배울 수도 있지 싶었습니다.

제주의 빼어난 자연경관에 세계적인 거장들의 건축물들이 하나 둘 세워지면서, 제주는 더 아름다워지고 있는 중입니다.

바다 건너로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섭지코지 끝에 들어선 안도 다다오의 ‘글라스 하우스’. 감각적이면서 기하학적인 외관이 인상적이지만, 성산일출봉의 경관을 가리는 데다 건축물의 선이 단단해서 ‘신경질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 제주에서 건축과 미술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

제주에서 건축물을 찾아나서자는 제안은 다소 낯설 수도 있겠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주변에 두고서 사방이 벽인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인공적인 건축물들을 찾아다닌다는 게 갑갑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제주의 건축을 만난다는 것은 제주의 빛과 바람을 시멘트 구조물에 오롯이 담아낸 작품을 만난다는 의미. 이런 여정을 통해 제주의 자연을 더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시선을 배울 수 있다. 제주의 자연경관에 건축 구조물을 액자 삼아 풍경을 들여놓은 건축가의 조형적인 건축물 앞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제주의 자연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제주에서 건축에 주목하는 이유는 최근 잇따라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건축물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안도 다다오, 이타미 준, 마리오 보타, 리카르도 레고레타….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게 하는 세계적인 대가들의 건축물이 제주 곳곳에 들어서 있다. 

제주에서의 건축 기행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상상 하나. 먼저 자신이 건축가라고 생각해보자. 제주의 눈 덮인 한라산 영봉이 정면으로 보이는 최고의 자리에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는 과제가 떨어졌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부시게 펼쳐지는 협재해수욕장의 언덕쯤이라도 좋겠다. 건물 자체의 미감은 물론이거니와 완성된 건축물의 프레임을 통해 내다보이는 시선까지 고려해야 한다. 적절한 메시지와 울림도 담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건물이 주변 경관을 다치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 얼마나 고민스러울 것인가.

이쯤이면 제주라는 빼어난 자연 공간 속에 인공 건물을 들여넣는 건축가들의 고민이 익히 짐작되지 않는가. 제주에서 당대 최고의 건축 대가가 세운 건축물을 찾아나서는 것은, 바로 그들이 제주의 자연 속에서 어떤 고민을 했고 또 어떤 해답을 찾았는가를 찾아가는 여정과 다름없다.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세운 유리피라미드 형태의 ‘아고라’. 낮에는 태양의 기운을, 밤에는 별빛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 ‘제주의 빛’이 빚어낸 건축물의 아름다움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제주에 건축물을 세우면서 지향한 것은 ‘자연과의 조화’ 혹은 ‘휴식과 명상’이다. 그 이유는 한 가지. 그곳이 ‘제주’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품은 힐링의 공간. 건축가들은 제주를 이렇게 해독했다. 제주의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축물은 효율과 쓸모만으로 독해되지 않는다. 시각적인 형태의 미감으로만 읽히는 것도 아니다. 자연경관은 말할 것도 없고 건축물에 드리운 빛과 그늘까지 건축의 일부분이 되고, 건물이 유도해내는 바람마저도 형태를 갖게 된다.

여기다가 건물 안팎의 동선과 시선마저도 철저한 계산을 통해 의도돼 공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더러는 제주의 자연 속에서 빛과 바람을 차용했고, 또 다른 건축가는 오름의 부드러운 곡선을 빌려 건물을 지어냈다. 파스텔 톤의 푸른 하늘과 청록빛 투명한 바다를 건물 액자 속에 가두는가 하면 화산석으로 이뤄진 제주에서는 보기 드문 호수를 한라산 중산간지역에 만들어놓고 제주의 하늘을 그 안에 담기도 했다. 건축을 통해 동선과 시선을 이끌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점을 만들어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자연의 풍경’을 구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건축기행의 첫 목적지는 서귀포시 중문의 ‘까사 델 아구아’. 이곳을 택한 것은 그 건물이 곧 철거될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까사 델 아구아’는 스페인어로 ‘물의 집’이라는 뜻. 지난 2011년 타계한 멕시코의 세계적인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의 유작이다. 건축물은 곧은 직선만으로 이뤄졌음에도 제주의 흙과 바다의 색감, 그리고 빛을 담아내 화려하다. 건물의 외벽은 제주의 흙빛이자 멕시코 특유의 색감을 연상케 하는 붉은색이고, 내부는 화려한 파스텔 톤의 색조들이다. 건물 안쪽의 현란한 색채감을 압도하는 주연은 단연 빛이다. 건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계산해 볕의 기울기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공간의 질감과 색조가 달라지는 모습이 압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빼어난 건축물이 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 까사 델 아구아는 애초에 대규모 호텔 건설에 앞서 모델하우스 겸 갤러리로 지은 건물. 그런데 호텔이 완공되면서 임시건축물로 허가받은 모델하우스는 존폐논란에 휩싸였다. 제주도 측은 까사 델 아구아가 한시적 허가기간이 지난 불법건축물이니 만큼 헐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문화예술인들은 세계적인 건축가의 빼어난 유작의 철거에 반대하고 있다. 호텔이 애초의 설계에서 상당부분 변경된 상황에서 설계 그대로 지어진 모델하우스만큼은 ‘작품’으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문화예술인들은 연일 시위를 벌이면서 건축물 주변의 나뭇가지에다 철거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적은 노란 리본을 매달고 있다. 양쪽의 주장은 평행선을 긋고 있지만, 그곳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봤다면 망설임 없이 ‘존치’ 쪽의 손을 들어주게 되리라. 

성이시돌목장의 테쉬폰. 독특한 외양에 세월의 더께가 입혀져 예술작품을 방불케 한다.